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역사 (문단 편집) ==== 유럽 ==== * '''[[동로마 제국/역사|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옛 [[서로마 제국]][[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의 영토 탈환]]을 계획하며 [[동고트 왕국]]을 침공하고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한 이래 8세기 중반까지 교황권은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탈리아 수복 이후 얼마 안 가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지만, [[로마]]와 교황권은 [[라벤나 총독부|동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남았고]],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게 되면서 교황이 동로마 제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교황은 [[로마 황제|동로마 황제]]가 임명하였으며, 동로마 제국령인 [[레반트]]와 남부 이탈리아 등지 출신 [[그리스인]] 교황들이 여럿 선출되었다.[* 이 점을 전문적으로 다룬 전문서적이 'Byzantine Rome and the Greek Popes'이다.] 초창기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의 일개 [[신하]]에 불과한 취급을 받았으며, 동방교회나 동로마 황제와의 갈등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환되는 경우도 많았고, [[비질리오]] 교황이나 [[마르티노 1세]]처럼 동로마 제국에 억류되어 수모를 겪은 교황도 있었다. 다만 황제 [[포카스]]의 칙령인 "복된 사도 [[베드로]]좌는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마땅하다."[*출처 Oestreich, Thomas. (1913). [[https://en.wikisource.org/wiki/Catholic_Encyclopedia_(1913)/Pope_Boniface_III|Pope Boniface III]].]에서 보듯 최선임 주교로서의 명예는 인정받았다. [[레온 3세]]가 황제로 즉위하여 성상 파괴령을 내리면서 [[성상 파괴주의]]를 두고 교황과 황제 사이의 분쟁이 생겼고, 이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갈등을 격화시켜 훗날 [[동서 대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성상 파괴 논쟁이 지속된 와중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 거점인 [[라벤나]]를 점령하면서 로마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보호를 요청하여 랑고바르드 세력을 몰아내었고, 옛 동로마 제국령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이 직접 통치하는 [[교황령]]이 되었다. [[800년]]에는 교황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새로운 서방 제국]]을 만들어서 갈등을 겪었고, [[1054년]]에는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한 특사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여 [[동서 대분열|동서 교회의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호 파문 사건은 서방의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가 별개의 종파로 갈라서게 된 [[분기점]]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정작 그 당시에는 파급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서로를 파문하고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인 [[1071년]]에 일어난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동로마는 [[소아시아]]를 [[셀주크 제국]]에게 빼았겼고, 이후 즉위한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교황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성전을 선포하여 [[1095년]]부터 [[십자군 전쟁]]이 전개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세력과 동로마는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협력을 지속했다. 그러나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우는 초유의 사태가 터졌고, 이때 교황은 기존의 세계 총대주교를 대신할 [[라틴 총대주교|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임명하여, 가톨릭과 동로마[* [[로마인|동로마 유민]]들이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세워 동로마를 부흥시키려 했는데, 그중 니케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서 정통으로 평가받는다.]&정교회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 이후,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가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추진하면서 해결되는 듯 했으나, 동로마 내부의 통합 반대파가 격하게 반발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발호로 동로마 제국이 점점 몰락하자 동로마 황제들은 다시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추진하며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동서 교회 내부의 통합 반대파들로 인해 크게 진척되지 못했고,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갈등과 타협을 반복해온 교황과 동로마의 관계는 끝을 맺었다. * '''중세 이후 [[이탈리아/역사|이탈리아]]:''' 동로마를 대신하여 교황의 보호자가 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이후]],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의 주요 세력으로는 북부의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중세 이탈리아 왕국]]과 그 [[구성국]]들[*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등], 동로마의 [[번국]]으로 출발했으나 동지중해의 패권국으로 거듭난 [[베네치아 공화국]],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 두 왕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통일 이후의 [[이탈리아 왕국]] 및 현대 [[이탈리아 공화국]]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까지, 서부 해안부터 동부 해안까지 이탈리아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교황령]]과, [[이탈리아 반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로마]] 시의 관할권을 놓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이탈리아의 세속 세력과 [[교황청]]은 끊임없이 경쟁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교황의 영역인 [[바티칸]]은 이탈리아라는 세속 국가 한 가운데 떠 있는 성속의 공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왕국]]의 왕들이나, [[이탈리아 공화국]]의 [[이탈리아 총리|총리]]들에게 바티칸과의 관계는 언제나 민감한 성질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나 지금이나 이탈리아인들의 절대 다수는 상대적으로 신실한 [[가톨릭]] 신도들이기 때문에 세속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관계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 '''[[독일/역사|독일]]과 [[오스트리아/역사|오스트리아]], [[스위스/역사|스위스]]:'''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세 [[독일어권]] 국가들의 공통 역사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있고, 이후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현대 [[독일]]이 있고, 오스트리아 지역은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현대 [[오스트리아]]가 있으며, 스위스 지역은 [[칸톤]]의 연합체에서 시작하여 현대 [[스위스]]로 발전했다. 독일어권 지역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경제와 인구 그리고 이에 기반한 군사력의 핵심을 담당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이탈리아]]를 중시한 제국의 전체적 정책 덕분에 사회·문화·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중앙집권화가 매우 늦었다. 경제력과 인구가 많고 각 지방 영주로 분열되어 있다는 배경들이 시너지를 일으킨 덕분에 독일 지역은 14세기 무렵부터 16세기 무렵까지 한때 부패한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 왕국|프랑스]]나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에서와는 달리, 반발에 대한 별다른 부담 없이 돈을 갈취할 수 있는 교회의 지갑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종교개혁]] 이후로는 반은 [[가톨릭]], 반은 [[개신교]]인 지역이 됐다. 개신교 지역인 북독일 지역, 특히 [[프로이센 왕국]]이 중심이 되어 [[독일 통일|독일이 통일된]] 이후로는, 현대 [[독일 연방 공화국]]의 등장 이전까지 독일과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매우 안 좋았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동시에 강경한 자유민주주의자였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연방 공화국의 첫 번째 총리로 취임하면서 독일 내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확실히 재정립되고,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가톨릭 교회의 개혁 및 이권 포기가 맞아떨어지며 이후에는 독일 연방 정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예전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 * '''[[프랑스/역사|프랑스]]:'''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의 주요 국가로는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제2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현대 [[프랑스]] 등이 있다. 프랑스는 교황청에서 교회의 맏딸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가 가장 신뢰하는 국가 중 하나로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비록 교세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현재에도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는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유럽 내의 여러 정치·경제 문제나 중앙 집권화, [[정교분리]] 등의 문제로 얽히고 설킨 현안이 많은 관계기도 하다. * '''[[스페인/역사|스페인]]과 [[포르투갈/역사|포르투갈]]:'''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등장한 [[스페인]] 왕국과 가톨릭 교회는 비록 국제 정세나 국익 문제로 여러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고, [[스페인 내전]]과 같은 가톨릭 교회의 안 좋은 역사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둘은 매우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또한 동시에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와 [[필리핀]] 식민 사업을 통해 가톨릭의 교세를 유럽 외부의 세계로 크게 확장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예수회]]의 선교 문제나 [[포르투갈 왕국]]과의 남미 지역 국경 획정 과정,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문제 등을 놓고 교황권과 스페인은 견해차를 보이기도 했다. * '''[[영국/역사|영국]]과 [[아일랜드/역사|아일랜드]]:''' 중세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 7왕국]]이 난립하다가 [[웨식스]]에 의해 통일되어 [[잉글랜드 왕국]]을 형성했고, [[스코틀랜드]]는 [[게일인]]과 [[픽트족]]이 함께 [[스코틀랜드 왕국]]을 형성했으며, [[웨일스]]는 독립 공국이었으나 잉글랜드에 합병되었다. [[아일랜드 섬]]은 [[13세기]]부터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영지|지배를]] [[아일랜드 왕국|받았기에]], 실질적으로 영국 및 아일랜드의 양대 세력은 잉글랜드[* 지금의 잉글랜드+웨일스+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라는 두 [[왕국]]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둘다 가톨릭을 [[종교 국가|국교]]로 삼았지만, 16세기 이후 잉글랜드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형성하며 갈라섰고[* [[메리 1세]] 시대에 잠시 가톨릭으로 복귀하긴 했다.], 스코틀랜드는 가톨릭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축출된 이후 [[어린 나이에 즉위한 군주들|1살이라는 극히 어린 나이에]] [[스코틀랜드 국왕|왕]]으로 옹립된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된 후 [[칼뱅주의]]를 추구하는 [[장로회]]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나라는 [[동군연합]]이 되었고, 그의 아들 [[찰스 1세]] 시대에 [[영국 내전|종교 문제에 국왕과 의회의 대립이 엮인 내전까지 겪은 후]], [[찰스 2세]]에 의한 [[왕정복고]]를 거쳐, [[윌리엄 3세]]가 주도한 [[명예 혁명]]을 통해 가톨릭교도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확고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두 나라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공식적으로 한 나라가 된 이후]]에도 가톨릭은 금기시되어 교황청과 [[영국 정부]]의 관계는 극히 험악했는데, [[1821년]] 가톨릭 해방법이 제정되면서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을 민족 정체성으로 삼은 [[아일랜드인]]들은 이후에도 계속 [[아일랜드 대기근|차별과 압제에 시달렸고]], 결국 [[아일랜드 독립 전쟁|무장투쟁을 벌여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섬에서 개신교 신자가 절반 가까이 되는 지역인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 치하에 남았고, [[1970년대]]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개신교 무장단체 VS 가톨릭 무장단체([[IRA]]) 간의 극한 대립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타협을 이루었다. * '''[[폴란드/역사|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역사|리투아니아]]:''' [[폴란드 영지|폴]][[폴란드 왕국|란드]]는 [[10세기]] [[미에슈코 1세]]의 개종을 계기로 가톨릭 국가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리투아니아]]는 [[13세기]]에 이르러서야 국가를 형성하고 [[14세기]]까지 [[발트 신화|발트 다신교]]를 고집한 유럽 최후의 [[다신교]] 국가였다. 그러나 14세기 말 리투아니아 [[대공(작위)|대공]] [[요가일라]]와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의 혼인을 통해 리투아니아 역시 가톨릭 국가가 되었고, [[1569년]]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통합되었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폴란드 동부와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며 정교회를 강요하고,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및 [[독일 제국]]이 폴란드 북서부를 지배하며 [[루터파]]를 강요하기도 했고[*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 또다른 열강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오스트리아 제국|트리]][[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아]]는 같은 가톨릭 국가라서 종교적인 탄압은 없었다.], [[소련|공산]] [[폴란드 인민 공화국|정권]]의 [[국가 무신론]] 추구에 따른 탄압도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가톨릭은 두 나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또한 [[냉전]] 시대 말기에는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동유럽 혁명|폴란드를 비롯한 동구권의 민주화]]와 [[탈냉전|냉전 종식]]에 기여하기도 했다. * '''[[헝가리/역사|헝가리]]:''' [[헝가리인]]의 조상은 본래 가톨릭 국가들을 약탈하던 [[마자르족|이교도 민족]]이었으나,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에 의해 [[헝가리 왕국|헝가리 최초로 국왕 칭호를 받으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오스만 헝가리|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무슬림]]보다 낮은 2등 국민 취급을 받았고, [[냉전]] 시대에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가톨릭은 헝가리의 최대종교로 남아있다. 또한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되었기에 그의 왕관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라 불리는데, 단순한 왕관이 아닌 헝가리 [[주권]]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19세기]]에는 [[헝가리 왕국]][*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고, [[1867년]] [[대타협]]을 통해 본토인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관계를 맺는 [[이중제국]]을 형성했다.]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그 영향을 받는 지역]]이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또한 헝가리의 마지막 왕이었던 [[카로이 4세]][*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로서 더 유명하다.]는 가톨릭 교회에서 시복되어, 성 이슈트반 왕관의 첫번째 주인과 마지막 주인[* 물론 어디까지나 [[왕|왕관을 머리에 쓰는 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지, 성 이슈트반 왕관 자체는 현재 헝가리 의회에서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이 나란히 성인과 복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 '''[[체코/역사|체코]]:''' [[체코]] 최초의 국가인 [[대 모라비아 왕국]]은 초기에는 동로마와 교류하며 동방교회[* [[1054년]] [[동서 대분열]] 이후 [[정교회]]로 계승되었다.]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교황청 역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의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되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보헤미아는 이웃나라인 [[폴란드 영지|폴란드]]에 가톨릭을 전파하기도 했으나, [[15세기]]에 [[마르틴 루터|루터]]보다도 먼저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얀 후스]]를 따르는 [[후스파]]가 등장하여 [[후스 전쟁]]을 겪었다. 가톨릭과 후스파 내부 온건파의 타협으로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17세기]]에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창문을 던진 게 아니라, 창문 밖으로 사람을 집어던진(...) 사건이다.]을 계기로 [[30년 전쟁]]이라는 새로운 종교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체코의 가톨릭 교회는 냉전 시대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살아남긴 했지만, 현재 체코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도 [[무종교|무종교인]]보다는 훨씬 인구가 적을 적도로 세속적인 국가가 되었다. * '''[[덴마크/역사|덴마크]]와 [[스웨덴/역사|스웨덴]], [[노르웨이/역사|노르웨이]], [[아이슬란드/역사|아이슬란드]]:''' [[노르딕]] 국가라 불리는 이 나라들은 중세 시대에 가톨릭을 받아들였는데,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3국은 독립 왕국을 형성했고,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초의 [[의회]]를 만든 나라였으나 [[노르웨이 왕국]]에 합병되었다. 14세기 말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칼마르 동맹]]을 형성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는데, 칼마르 동맹은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파]]로 갈아탔고, 이후 칼마르 동맹에서 이탈한 스웨덴도 루터파 신앙을 유지했다. 그리고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주요 개신교 세력으로 참전하기도 했는데, 전후 스웨덴에서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고 [[로마]]로 이주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루터교회]]는 노르딕 4국의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종교로 남아있으며[* 다만 예배 출석률은 낮다.], 가톨릭은 존재감 없는 소수종파에 불과하다, * '''[[핀란드/역사|핀란드]]:''' [[핀란드]]는 13세기 이래 스웨덴의 지배를 받으며 가톨릭 역시 받아들였으나, 종주국인 스웨덴이 루터파로 갈아타면서 [[핀란드인]]들 역시 루터교회 신도가 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핀란드 대공국|핀란드를 지배할 때]] 정교회가 전파되어 루터교회 다음으로 큰 종파가 되었는데, 가톨릭은 두 종파에 밀려 지금까지 크게 힘을 못 쓰고 있다. * '''[[라트비아/역사|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역사|에스토니아]]:''' 두 나라는 민족 계통은 다르지만[* [[라트비아인]]은 [[발트족]], [[에스토니아인]]은 [[우랄어족|우랄족]]에 속한다.], 둘 다 [[13세기]]에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정복당하면서 가톨릭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리보니아 기사단이 [[루터파]]로 갈아타고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을 형성하면서, 두 나라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두 나라가 [[러시아 제국|러시아]]에게 정복당해서 정교회가 전파되기도 했고, [[국가 무신론]]을 추구한 [[소련]]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 그전에 이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가톨릭은 소수종파로 전락한 상태였다. * '''[[러시아/역사|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역사|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역사|벨라루스]]:''' [[동슬라브]] 3국은 공통 역사인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정교회]]를 믿었지만, [[러시아]]는 의외로 교황과 접점이 있다. 바로 [[모스크바 대공국|러]][[루스 차르국|시]][[러시아 제국|아]]가 [[차르]] 칭호를 사용하는 계기가 된 것이 교황청과의 접촉인데, [[동로마]] 멸망 이후 교황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지 않은 정교회 국가 중 가장 강했던 [[모스크바 대공국]]과 협상하여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이루려 했다. 그래서 교황은 마지막 [[로마 황제|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로서 [[교황령]]으로 [[망명]]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를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반 3세는 이를 이용하여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하고 [[차르]]를 칭했다.[* 정식으로 차르국 체제로 개편한 건 그의 손자 [[이반 4세]] [[루스 차르국|치세]]였고, [[표트르 1세]] [[러시아 제국|이후]]부터는 [[임페라토르]]를 칭했다.] 그러나 이반 3세는 스스로 동로마 황제의 뒤를 이은 정교회의 수호자라 자처하며 교황청에 [[통수]]를 날렸고, 소피아는 다시 정교회로 개종하며 남편을 지지했다. 이후 교황청과 접점이 없던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시절에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등 가톨릭 신민들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1905년]] 러시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전까지 가톨릭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한편 서부 [[우크라이나]][* 동부는 일찍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와 [[벨라루스]]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회에서 분리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동방]]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가톨릭]] 교회가 생기기도 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두 나라를 정복하면서, 두 나라의 가톨릭 역시 러시아 본토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았다. 이후 1905년부터는 짧은 종교의 자유를 누렸으나,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내전]]을 거쳐 수립된 [[소련]]이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면서 정교회와 함께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정교회는 [[2차 대전]] 시기 [[스탈린]]이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다시 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했으나, [[러시아 제국|제국]] 시절부터 소수종파였던 가톨릭은 [[그런 거 없다|그런 게 없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세 나라의 가톨릭 교회 역시 운명이 갈렸는데,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500만이 넘는 신도를 보유하며 정교회 다음으로 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과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은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다. * '''[[크로아티아/역사|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역사|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역사|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전체 인구의 50%가 [[무슬림]]이지만 가톨릭과 정교회를 합친 인구도 45%나 되며, 정치적으로는 가톨릭 [[크로아티아인|크로아티아계]], 정교회 [[세르비아인|세르비아계]], 무슬림 [[보슈냐크인]]이 각각 대통령을 뽑아 권력을 나눠 가지는 나라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모두 같은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쓰는 [[남슬라브]] 국가지만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이 각각 가톨릭과 정교회를 받아들이면서 갈라서게 되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왕국]] 시절 [[영지주의]] 계통의 [[보고밀파]]를 국교로 삼았다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이 전파되어 가톨릭 VS 정교회 VS 이슬람이라는 3파전 구도가 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세 나라는 [[유고슬라비아]]로 통합되었지만, [[2차 대전]] 때 크로아티아계 가톨릭 무장단체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정교회 무장단체 [[체트니크]]가 서로 상대방의 지지 기반이 되는 민족을 향해 [[학살]]을 자행했고,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보스니아 내전|보스니아에선 가톨릭 크로아티아계 VS 정교회 세르비아계 VS 무슬림 보슈냐크인이라는 3파전]]이 전개되었고, [[1995년]] [[데이턴 협정]]으로 종식되었다. 이후에도 [[크로아티아인]]들은 가톨릭을 계속 신봉하며 교황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세르비아인]]과 [[보슈냐크인]]들은 아직도 가톨릭에 대해 영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 '''근현대 [[그리스/역사|그리스]]와 [[키프로스/역사|키프로스]][* [[키프로스]]는 지리적으로 [[서아시아]]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이고 국민 다수가 그리스계라서 함께 서술한다.]:''' [[동로마]] 멸망 이후 [[그리스]]의 대부분[* [[코르푸]]를 비롯한 이오니아 제도는 가톨릭 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긴 했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리스 독립 전쟁|독립]]했는데, [[그리스 왕국]]의 초대 [[바실레프스|국왕]] [[오톤]]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가 축출된 후 즉위한 [[요르요스 1세]][* 본래 루터교회 신자였다.]는 정교회로 개종했고, 지속적으로 정교회를 [[종교 국가|국교]]로 우대했다. 또한 왕정이 폐지된 지금도 정교회는 국교이자 [[그리스인]] 대다수가 믿는 종교로 남아있으며, 19세기에 정교회에서 독립하여 형성된 [[그리스 비잔티움 가톨릭]]은 교세가 미약하다. 한편 그리스계 주민이 다수인 키프로스는 [[키프로스 왕국]]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으며 가톨릭이 전파되었으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해서 이슬람이 유입되었고, 지금은 키프로스 왕국 및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령]] 시절 이주한 극소수 [[라틴인]]의 후손들만이 신앙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정교회는 물론이고 [[북키프로스|북부의 튀르크인 무슬림]]들보다도 존재감이 없다. * '''[[아르메니아/역사|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으로 [[오리엔트 정교회]] 소속 토착교회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민족종교]] 역할을 하던 나라이며, 지금도 [[아르메니아인]] 대다수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다. 그러나 [[중세]] [[아나톨리아]]에 위치했던 아르메니아계 국가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십자군 전쟁]] 당시 가톨릭을 [[종교 국가|국교]]로 삼았던 역사가 있었기에, [[교황청]]과의 접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멸망 이후에는 아르메니아인들과 교황청의 접점이 다시 없어지긴 했지만 [[18세기]]에 일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직자]]들이 교황청과의 일치를 선언하고 [[아르메니아 가톨릭]]을 형성하면서, 소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가톨릭을 믿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