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레시 (문단 편집) == 역사 == || 날짜 || 행정구역 변천 || || 1686년 || 아키군 미야하라촌 '''구레포(呉浦)를 구레정(呉町)으로 개칭''' || || 1902년 9월 1일 || 아키군 와쇼정, 미야하라촌, 소야마다촌, 후타가와정 합병으로 '''구레정(呉町) 설립''' || || 1902년 10월 1일 || '''구레시(呉市)로 승격''' || || 2000년 11월 1일 || '''특례시로 승격''' || || 2016년 4월 1일 || '''중핵시로 승격''' || 본래 '구레'라는 명칭은 아키군 미야하라촌의 '구레포'로, 항구의 명칭이었다. 1686년에 아키군(安芸郡) 미야하라촌의 구레포가 구레정으로 개편되어 승격되었고 이후 1860년대까지 구레정은 인구 6만명의 작은 항구도시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1886년 5월 4일, 일본 제2해군 구레[[진수부]] 위치를 구레항으로 옮긴 이후 [[일본 제국]]의 해군 도시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일본 전국에 메이지 대합병이 시작되어 구레의 행정구역도 대폭 변하기 시작했다. 1889년 4월 1일, 히로시마현 내에서 정촌제(町村制)가 시행되면서 아키군 와쇼촌(和庄村), 미야하라촌(宮原村), 소야마다촌(荘山田村), 미야우라촌(吉浦村)이 설립되었다. 1889년 7월 1일에는 구레진수부가 창설되어 본격적인 해군도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892년 9월 1일에는 아키군의 와쇼촌이 와쇼정(和庄町)으로 개편, 1902년 4월 1일에는 아키군 미야우라촌에서 후타가와정(二川町)이 분립되고 이후 아키군의 와쇼정, 미야하라촌, 소야마다촌, 후타가와정이 합병하여 '''구레정(呉町)'''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한달 후인 1902년 10월 1일, 구레정은 구레시로 승격되었다. 1903년 11월 10일, 구레 해군 공창이 설립되면서부터 구레시에 여러 공장들이 들어서며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해 1910년대 인구 20만명을 달성하게 된다. 1921년 1월 15일, 구레 해군 공창의 부지는 더 확대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군항으로 발전했으며, 상당수의 [[일본]] [[군함]]이 [[구레 군항 공습|구레항]] 소속이었다.[* 대체로 [[수상함]]은 구레, [[잠수함]]은 [[사세보]]가 모항이었다.] [[야마토급 전함]]도 근처의 히로항에서 건조되어 구레항에 소속되었다. 1928년 4월 1일, 아키군(安芸郡)의 케고야정(警固屋町), 요시우라정(吉浦町), 가모군(賀茂郡)의 아가정(阿賀町)을 편입하여 도시규모가 더 커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21일에는 니가타정(仁方町), 히로촌(広村)을 편입하여 '''히로시마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2년 후인 1943년, 인구가 40만 4257명이 된 후 전성기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태평양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야마토 전함이 침몰한 이후 일본의 전세는 급격히 약해졌고 미군의 본토 공격은 해군 전력의 중심지인 구레시로 향하게 되었다. 1945년 5월 5일, 히로우미 해군 공창에 대규모로 무차별적인 폭격이 실시되었고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32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6월 22일, 구레 해군 공창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후인 7월 1일, 미군 폭격기는 구레시의 시내까지 폭격을 시작했고 수많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발생시켰다.[* 구레시가공습(呉市街空襲)으로 불린다.] 이후, 7월 24일에서 28일까지 이어진 5일간의 공습인 [[구레 군항 공습]]으로 야마토 침몰 이후 남아있던 전함들은 함재기 공격으로 대부분 궤멸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공습으로 인해 도쿄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다음으로 민간인 피해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1900년의 구레시 인구는 14만명이였으며 전성기때인 1940년대에는 40만명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구레시는 미군의 수많은 폭격을 받았으며 당시 폭격으로 인해 사망한 시민은 약 3만명 가까이 될 것으로 추측된다. 구레시에 일하고 있던 공장 근무자들은 [[히로시마시]]에 파견을 나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당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사망한 구레시 시민들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다음날 복구를 위해 구레시 출신의 군인들과 시민들 수만명이 동원되기도 했으며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합병증 등을 유발하여 사망한 경우도 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레시의 케고야 지역에는 당시 공습과 원폭으로 인해 사망한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의 공동 묘지가 마련되어 있다.] 1944년 구레시의 인구는 41만명에 달했으나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1950년, 인구는 17만명으로 급감했다. 거의 60%에 달하는 인구 유출이 발생했다. 물론 이는 사망자가 아닌 단어 그대로 "인구 유출", 즉 폭격으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인원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본 제국의 패전 이후, 미군에 의해 일본제국군 구레진수부는 임시 해체되었고 1946년 2월 1일, 영연방 점령군이 선견대를 파견하여 주고쿠와 시고쿠의 통치권을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았다. 1951년 6월 28일, 구 군항 도시 전환법(旧軍港市転換法)이 시행된 후 1954년 7월 1일에는 [[해상자위대]]의 [[구레지방대]]가 설치됨으로서 다시 군항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1956년 10월 1일, 아키군 텐노정(天応町), 쇼와촌(昭和村)과 가모군(賀茂郡)의 고하라촌(郷原村)을 편입하는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1975년에는 태평양 전쟁 이후이자 헤이세이 대합병 이전 최대 인구인 24만 2655명을 달성하게 되었다. 2000년 11월 1일, 구레시가 마침내 특례시로 승격되었다. 이후 헤이세이 대합병이 시작되어 2003년 4월 1일에 아키군의 시모카마가리정(下蒲刈町)을, 2004년 4월 1일에는 도요타군(豊田郡) 카와지리정(川尻町)을 편입하였다. 그리고 2005년 3월 20일, 아키군 온도정(音戸町), 구라하시정(倉橋町), 카마가리정(蒲刈町)과 도요타군 야스우라정(安浦町), 토요하마정(豊浜町), 유타카정(豊町)을 편입하여 도시 행정구역이 현재와 같이 자리잡게 되었다. 2016년 4월 1일에는 중핵시로 승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