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리 (문단 편집) == 역사 == 인류와 구리의 관계는 긴데, 약 10000년 전 옛날의 [[이라크]] 북부 유적에서 자연동을 이용한 구슬 장식품이 발굴되었다. 철보다 낮은 온도에서 녹고,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인류가 철을 녹이는 방법을 발견하기 전까지 널리 활용]]되었으며, 최초로 활용된 금속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인 즉슨 동은 그 연성과 쉬운 세공난이도 덕분에 옛부터 수요가 꽤 많았다. 청동기가 철기 전에 온 것도 그 덕이다. 특히 구리 광석은 눈에 띄는 특유의 청록색을 띄고 있어서 고대인의 눈에도 암석에 뭔가 특수한 물질이 들어있다는 느낌을 주고 광맥을 발견하기도 쉬워서 일찍부터 이용되었다. 그러나 동은 나름 귀금속이라 철에 비해 구하기도 힘들었다. 거기다 주석은 더더욱 구하기 어려워서 주석을 교역으로 구할 수 있었던 곳은 청동기로 일찍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는 주석을 쓰지 않고, 순수 동으로만 금속기를 만드는 [[동기 시대]]가 1000~1500년 이상 꽤 오랜 시간 있었다. 이집트는 제2 중간기 (기원전 18~16세기/제13~17왕조) 시대에 힉소스인들이 청동기 병기와 [[전차]]를 끌고 침공해올 때까지 주석을 대규모로 구할 길이 없어 순동으로 제작한 도구들이 더 널리 쓰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주석이 생산되기 않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주석을 구하기 위해 멀리 오늘날 [[영국]]에까지 가서 주석을 사올 정도였다. 정작 [[청동기 시대]]에도 도구는 석기가 주류였고, 청동기는 지배층의 전유물이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성경에도 [[솔로몬]]의 치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나타낼 때 [[아연]]-구리 합금인 [[놋쇠]]가 매우 풍부했음을 자랑하는 대목이 있을 정도니까. 심지어 [[짐바브웨]]처럼 구리도 주석도 없어서 그냥 철기시대로 건너뛰어버린 문명도 심심치않게 발견되는 지경이다. 덕분에 구리는 수요는 많으나 공급은 제한적인 금속이었다. 그래서 가격이 올라가고 귀금속이 되는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도 구리 시세는 kg당 5달러를 넘는다. kg당 450달러씩 찍는 은이나 4만 달러씩 찍는 금에는 비교가 안되지만 kg당 50센트 밑에서 노는 강철보다는 한 레벨 위.] 덕분에 동은 금은보단 흔하지만 철 같은 일반 금속들보다는 귀한 덕에 지불수단으로써 흔히 이용되었다. 동전부터 구리 엽전에서 나온 단어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경향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는데 [[놋그릇]]은 양반집에서나 제기로 들여놓는 귀한 그릇이었고 외국에도 고려동이라 불리며 백청자 부럽지 않은 고가로 팔려나갔다. 일반 민초들은 놋그릇은 손도 못 대는 귀중품이었다. 지주들도 목숨걸고 제기로 짱박아두는게 [[유기(금속)|유기]]였다. 거기에 국가안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전략자원으로써의 쓰임새도 있었는데 바로 [[대포]]다. 야금기술이 부족하던 근세에는 철제대포를 만들기 힘들었다. [[무쇠]]라고도 하는 [[주철]]은 [[연성]]이나 [[탄성]]이 구리합금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게 전근대 철기의 주류였다. 그 시절에 [[강철]] 얻으려면 말 그대로 몇 주 동안 철괴를 불에 넣어서 탄소를 제거하는 탈탄작용이 필수인데 안그래도 철 잡아먹는 괴물인 대포에 그정도 품을 어떻게 들이겠는가? 조선시대 때 제일 흔하던 [[현자총통]] 하나가 50kg를 넘기는데 말이다. 결국 그 시절 강철로 대포를 만드는건 대단한 [[돈지랄]]에 가까운 일이었고, 결국 현실에 타협해 무쇠로 철제대포를 만들면 발사 시 충격에 [[와장창|'와장창!']]하면서 깨져나가는 것이다. 덕분에 동서양 할 것 없이 근세에는 청동대포가 유행이었다. 화력이면 환장하던 [[조선]]이 과연 눈독 들일만한 전략자원이었는데 문제는 조선에는 변변한 구리 산출지가 없었다는 거다. 덕분에 조선은 전략자원인 구리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해오며 충당해야 했다. 이는 나름 조선왕실에서도 임란 전부터 심각하게 인지하던 문제인데 딱히 타국에서 수입을 대체할 선택지도 없었다. 반면 [[일본]]은 1700년 단 1년만 해도 구리 5,400톤을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혹자들은 1700년대 초반 수출물량만 합쳐도 20만톤은 간단히 넘길거라고 하는데 이 구리는 단지 조선, [[중국]]과 같은 근처에서만 소비된게 아니고 8할이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수출되었었다. 거기에서 상당수는 [[동인도회사]]의 자금이자 구입대금으로 사용되었다. 어쩌면 이 구리가 [[대영제국]]의 손발을 잇는 대동맥 그 자체였던 셈. 이는 다른 구리산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웨덴]] [[팔룬]]의 구리광산은 11세기동안 채굴되며 유럽 최대 구리광산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동안 팔룬의 동광에서 전 세계 구리생산량의 70%를 충당했을 정도로 구리 생산량이 많았기에 팔룬은 스웨덴 제2의 도시였고, 거기서 나온 구리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대포가 되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지붕을 덮고 [[스페인 제국]]의 동화가 되어 [[라틴 아메리카]]를 정복했다. 야만신과 동토의 땅이 지금 북유럽에 우뚝 선 선진국가로 발돋움할 원동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스웨덴에서는 17세기 구리본위제 화폐를 사용했다. 당시 스웨덴은 구리가 많았기에 은 대신 이를 이용해 화폐를 만든 것. 헌데 은을 구리로 대체하다 보니 크기와 무게가 상상을 초월했다. 1644년에 발행된 10달러 동전은 길이가 1m에 무게는 20kg에 육박했다고 한다. 실생활에서 이 동전을 사용한 건 아니고, 은행에 예치한 뒤 영수증을 지폐처럼 사용했다고. 중국 [[윈난성]]도 옛부터 구리의 주요 산지로 [[한나라]] 시기부터 구리가 생산되었으며 [[촉한]]은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화폐를 안정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고 현대에 들어서까지 구리가 채굴되고 있다. 이렇게 인류사의 흥망성쇠는 구리의 흐름을 통해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철기부터 [[바다 민족]]에 의해 끊어진 청동 교역의 대체재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니 말이니 철기시대의 시작도 구리가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평통보]] 같은 옛날 동전에도 구리가 주로 쓰였는데 조선시대에 화폐유통이 활발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구리는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고 대부분 일본 등에서 비싸게 수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발행비용이 비쌌고 그러니 발행량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철이나 [[니켈]] 같은 것이 화폐로 통용되는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 국가 공권력이 강해지고 경제 체제가 확립된 후다. 그 전에는 동전 만들 구리가 모자라서 철로 만든 철전을 쓰기도 했는데 대부분 다 실패했다. 원래 그 당시 화폐들은 실질가치를 따지는데 액면가만 동전으로 넣고 철전 발행해봤자 순식간에 소액 거스름돈에나 쓸 정도로 가치가 폭락해버린다. 그나마 소액 거스름돈이라도 되는 것은 금화, 은화, 동화 등 다른 화폐가 있어서 보조용으로 쓰는 것이고 만일 철전만 있다? 이러면 외국에서 안받아주는 국내용 화폐가 되는 것이다. 전쟁이라도 나서 무기 만들 철이라도 부족하지 않는 한 거래가치는 제로에 육박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에서 상평통보 발행할 때도 맨날 전황이라고 부자들이 금괴 모으듯이 [[엽전]] 모아서 돈 모자라는 소리가 나고 발행비용이 높아서 폐지하자는 소리 나오고 구리 아끼려고 다른 금속 섞었다가 품질 나빠져서 더 빨리 바스라지는 통에 수명이 더 줄어들고 사적으로 몰래 만드는 경우까지 많이 발생해서 개판 그 자체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