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주퉁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3전구 부사령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0월 5집단군 총사령을 겸하였다. 11월, 강소상정부주석을 겸하였다. 일본에 대한 강경파였으나 일본이 삽시간에 화북을 휩쓸고 상하이까지 밀어닥치자 장제스에게 [[트라우트만 공작]]을 받아들일 것을 진언하였으나 장제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12월, 3전구 사령장관이 되었다. 1939년에 열린 1차 남악 군사회의에서 연강거점을 유지하고 일본군의 수송함선을 타격하여 일본군의 보급선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1939년, 장제스가 하달한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 주공을 맡아 12월부터 장강 하류의 일본군 13군을 타격했고 난창, 항저우를 총공격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 116사단을 격퇴하고 장강 하류의 여러 요충지들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며 116사단의 반격도 격퇴했다. 또한 10집단군을 추가로 동원하여 항저우의 일본군 보급기지와 중화민국 유신정부 청사를 파괴했다. 이후 1940년 4월까지 점령지에서 버텼으나 일본군 2개 사단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이후 장제스로부터 1940년 2월의 류저우 군사회의에서 14개 사단을 가지고 1개 사단을 가지고도 퇴각한다고 크게 비판받았다. 이후 공산당 [[신사군]]이 3전구 관할지역에서 국민당에 정면도전하면서 명령에 불복종하자 1941년 1월, [[환남사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1942년, 지나 파견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가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에 보복하기 위해 지휘한 절공작전에 직면하여 일본군 8개 사단의 맹공을 받고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1945년 5월에 개최된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