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북위의 화북 통일 === 서진 말 [[영가의 난|영가(永嘉)의 대란]]은 중국을 남북으로 분열시켰고, 그 이후 관제제도도 남북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발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 북방에서는 오호의 쟁패전이 그 이후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패자(覇者)가 바뀔 때마다 그 제도도 새롭게 바뀌었기 때문에 계통적인 발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있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기록에 나타난 관명으로 추측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삼공(三公)중심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민족 왕조 아래에서는 삼공 이외의 중국식 관명을 사용해도 그 직무가 중국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오호 정권 아래 있던 한족이 현저히 그 자유를 구속당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상류 귀족이나 호족이 이것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고는 속단할 수 없다. 그들은 주권자의 부름에 응하여 보좌회의의 대표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항상 전시 체제 아래에 놓인 화북 중원에서 그들은 오히려 아래를 향해서는 마음대로 특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듯하다. 오호의 쟁패전에서 최후에 살아 남은 것이 생번(生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비 [[탁발부|탁발씨]](拓拔氏)의 [[북위]] 왕조였다. [[참합피 전투|참합피의 승리]]로 북위는 [[병주]](幷州)라는 광대한 한인 거주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남방에 대한 침략이 진행되면서 북위는 한인의 경제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사방으로 정복의 손길을 뻗쳤다. 이것과 동시에 한인 관리의 조정 진출이 시작되었고, 황제의 권력이 한인 관료의 지지를 얻어 현저히 강화되었다. 이것에 대한 북족 특권 계급의 불만이 폭발하여 황시 2년 [[하란부]]를 중심으로 큰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반란은 북위 왕조에게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로써 북족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탁발사|명원제]]를 거쳐 그 아들 [[태무제]](太武帝)는 북족과 한인의 융화를 꾀하였고, 강고한 기초 위에서 사방에 대한 경략(經略)을 재개하였다. 앞서 북위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철불부]]는 오르도스 남부의 통만(統萬)에 의거하여 혁련부(赫連部)란 이름으로 재기한 뒤 [[북하]](北夏)을 건설하여 다시 강성해졌다. 그러나 태무제는 몸소 징벌에 나서 북하를 명망시켰다. 5호의 잔존 세력인 요서의 [[북연]]이나 양주의 [[북량]]까지 평정되었고, [[철륵|고차]](高車)를 대신하여 외몽골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연]](柔然)도 태무제에게 큰 타격을 받아 북쪽으로 도망하고 그 수십 만 부락이 북위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영가의 난 이래 혼돈에 빠져 있던 화북 중원은 그 뒤 130년이 지나 비로소 다시 통일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