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북제 치하의 새로운 경향 === [[동위]]는 이윽고 [[북제]]에 찬탈되지만, 효문제 이후의 북위 정치를 비교적 충실하게 계승한 것은 북제이다. 따라서 북제의 제도는 대체로 북위의 제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북제는 북위의 귀족제도를 더 한층 추진시킨 면이 있는 동시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정이 일어나서 일찍 귀족제도 붕괴의 단서를 나타낸 점도 주의해야 한다. 북제는 군뿐만 아니라 현에도 중정을 두었다. 중정은 전대와 같이 주군 혹은 현 속료의 인선에 참여하는 동시에 본지 출신 관료의 임관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인정을 부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북제의 관품은 북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북제는 북위 말년의 제도를 이어받아 지방 학교의 확충을 단행하였다. 북위 이래 귀족제도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정신 위에 선 시험제도가 점차 엄중하게 되고,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인사의 진퇴를 단행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북제서]]》권 45 [[번손]]전에, 중서, 문하 두 성의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시험제도가 발달해 가면서 옛 귀족제도가 붕괴되어 가는 것이다. 또한, 북제시대에는 이때까지 중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서역인이나 상인의 매관(賣官)이라는 특이한 상황이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족은 이러한 새로운 사태에 즉각 응할 수 없다. 그들은 아마 황금의 횡행이나 정치적 상인의 암약(暗躍)에 직면하여 혼란스러워 하였다. 이에 비해 서민 출신 한인은 훨씬 잘 적응했다. 이로 인한 신흥 세력의 출현으로 옛 귀족의 정치적 기반은 점차 잠식되어,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면서 수․당시대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