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결과 ==== 시간이 지나면서 경력과 전공을 바탕으로 실무직책인 탁직(濁職)의 관직을 부여밭은 한문(寒門) 출신들의 권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가끔씩 별볼일 없는 가문 출신이 전공을 바탕으로 황제가 되면서 한문(寒門)이 황족(皇族)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유송이래 남조의 창업군주들이 전부 이러한 한미한 무장 출신이다보니 권위를 인정받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이 귀족세력을 포용해야했다. 귀족들과 별개로 한미한 가문 인사들을 임용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관료제가 아니라 측근정치 형태가 되다보니 이들은 이들대로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귀족들은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썼다. 몸 치장은 기본이고, 온갖 허례허식이 생기기도 했다. 여기에 당시 유행하던 [[청담사상]]까지 결합하니, [[양(육조)|양]] 말기쯤 가면 고급귀족들이 마치 신선처럼 보이게 치장하고 살면서 실무가 뭔지도 모르는 생활을 영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누구나 옷에 향내가 스며들게 하고, 면도를 하며, 붉은 분으로 화장을 하고, 덮개가 앞으로 길게 나온 안락한 수레를 타며, 굽 높은 나막신을 신는다. 바둑돌 무늬의 넓은 보료에 앉아 잡색 실로 장식한 팔베개에 기대고, 좌우에는 노리개를 늘어놓는다. 들고 나는 모습이 느긋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신선 같았다. - (『안씨가훈』 《면학勉學》)][* 양나라 때의 사대부들은 모두 옷자락이 넓은 옷에 넓은 띠, 큰 관과 굽이 높은 신발 차림을 좋아했으며, 외출할 때는 수레나 가마를 타고, 귀가해서는 시중을 받았다. - (『안씨가훈』 《섭무涉務》)] 절정에 달했던 남조의 귀족문화는 [[후경]](侯景)의 난(548~552)을 계기로 종말을 맞았다. 이때 양나라가 멸망하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 양나라의 멸망과 함께 그들을 지탱해주던 권력과 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혼란의 와중에 고풍스럽게 시를 짓는 귀족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안지추(顔之推, 531~591?)의 안씨가훈(顔氏家訓).] 이 제도를 폐지할 수 없던 황제들이 궁여지책으로 상급 직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하급 직책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만든다던지, 측근들끼리만 정책을 결정한다던지 하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관료체제에 혼란이 발생하고, 부패가 가중되는 사태가 발생해서 오히려 결과는 더 안좋아졌고 안 그래도 혼란한 정국이 더 혼란해졌다. 이러한 양상을 제대로 된 관료제로 개편하려 시도한 인물이 위에서 언급한 [[양무제]] 소연인데 말년에 지치고 개혁에 필요한 냉혹함이 부족했던데다가 경제개혁에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후경의 난까지 겹치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후일 수문제의 과거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