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합작 (문단 편집) == 제2차 국공합작(1937~1945) ==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공산당은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수립해 [[난창 폭동]]을 일으켰으나 제압당하고 [[8.7 긴급회의]]를 통해 [[취추바이]]를 중심으로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시도했지만 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천두슈와 취추바이가 모두 몰락하고 이후 [[리리싼]]이 [[리리싼 노선]]을 전개하면서 1930년에 [[창사 폭동]]을 일으켰으나 망하고 말았다. 한편 마오쩌둥은 [[주더]]와 함께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농촌을 중심으로 한 [[유격전]]을 전개했으며 정강산을 포기한 후에도 강서성 루이진에서 강서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강서 소비에트는 [[부전사변]]으로 부침을 겪기는 했으나 1930년의 [[제1차 초공작전]]을 시작으로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까지 손쉽게 격퇴했으며 1931년 [[제3차 초공작전]] 때 위기에 처했으나 [[1차 양광사변]]과 [[만주사변]]의 어부지리로 극복하고 계속 영토와 무장을 확장하여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은 [[제4차 초공작전]] 직전 영도 확대회의에서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이 지휘하던 홍군은 1933년 실행된 [[제5차 초공작전]]에서 패배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간신히 [[옌안]]에 정착했지만 국민당은 그곳까지 토벌군을 보낸다. 당시 [[산시성(섬서성)|산시(섬서)성]]에 주둔한 홍군은 겨우 3만 명에, 통치 지역도 겨우 4개 현에 불과했다. 이에 공산당은 지방 언론을 이용해 '장제스는 [[만주사변|일본의 침략]]은 무시하고 내전에만 광분한다'는 [[프로파간다]]로 초공 작전의 중단을 시도해 봤지만 장제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추격을 시작했다면 공산당도 뿌리뽑히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공산당의 저런 프로파간다가 [[장쉐량]]에게 통했는데 그 결과가 [[서안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후에도 장제스는 바로 국공합작을 하지 않았다. 국공합작은 급작스러운 상황이 되어 버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장제스의 의도는 그러나 알 수 없다. 합작 이후 공산당은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했으나 실제로는 지키지 않았고 대대적인 세력 확대에 돌입했다. 국민당 입장에서 그럼에도 마냥 손해는 아니었다. 2차 국공합작과 중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572기의 전투기,폭격기 322대를 포함한 985대의 항공기, 소총 5만정,포병장비 1,317문, 전차 82대, 차량 1,550대, 탄약 1억 6450만발, 포탄 190만발, 대전차포 50문,항공유를 포함한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도움이 [[독소전쟁]]으로 중단될 때까지 국민당군에게 공급됬기 때문이었다. 의용군 신분으로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과 군사고문단, 2억 5천만 달러 상당의 차관까지 제공되었다. 독소전쟁 발발 이전까지 꾸준히 제공된 소련의 군사원조를 통해 1938년 독일의 배신 이후에도 국민당은 중일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https://m.blog.naver.com/atena02/222069369729|#]]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양측은 [[국공내전]]에 돌입했으며 결국 국민당은 1949년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국부천대|옮겨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