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병 (문단 편집) === 유럽 및 중동 === 고대엔 [[크레타]] 궁병과 [[스키타이|스키타이인]] 궁수가 유명하였고, 중세에는 [[영국군]]의 [[장궁]]병이 유명하였다. 다만 고대 그리스 문화권에선 궁병을 매우 천시하였다. 모두 같은 중갑과 무기를 들고 열을 맞춰 행군하는 중장보병은 평등하다는 의미로 그리스 시민권과 연관이 있었는데, 가볍고 싼 무장으로 "안전하게" 화살을 쏘는 궁병은 되도록 외부에 맡겼고 그리스 문화가 로마로 이어지며 유럽 전역에 영향을 주자 유럽 전반에 걸쳐 이러한 인식이 생기게 된다. 극단적인 예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라클레스"에선 다름아닌 헤라클레스가 활을 쏜다는 이유로 비겁한 겁쟁이라는 모욕을 하는 인물이 나올 정도다. 이때가 이미 헤라클레스가 히드라등 온갖 괴물들을 때려잡은 이후인데도 단순히 활을 잘 쏘니까 겁쟁이다라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곧바로 활은 전략적인 무기라는 반론이 나오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궁병을 얼마나 천시했는지 볼수 있는 예. 어찌보면 [[1차 대전]]까지 [[저격수]] 천시하는 풍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까지 스키타이인 궁수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특히나 스키타이인들은 유목민족 답게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기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뿐만 아니라, 그와 싸웠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조차도 동방원정 후기에 스키타이인 궁기병을 용병으로 택하여 데리고 다녔다. 유독 활을 사랑했던 [[영국]]에서는 오히려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활쏘기만 하라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삼기도 했는데, 채택한 활은 이러한 정책에도 숙련된 병사를 확보하는게 어려운 장궁이어서 영국의 궁수들은 대개 정예병이었으며, 팔과 상체 골격이 변형된 상태로 유골이 발굴된다. 이게 변형되어 그냥 평범한 활을 쏘는 궁병 하나 하나가 무슨 척후병 같은 정예병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영국의 손등을 보이며 v 사인을 날리는 욕이 [[100년 전쟁]] 당시 영국군이 장궁을 잘 썼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영국군 포로의 검지와 중지를 자른 것과 관련 있다는 얘기가 유명한데 딱히 증거가 없어 이는 현대에 만들어진 낭설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자 중무장 기병대가 주력이 된 서유럽의 경우 일반 궁병의 화살로는 중무장 기사를 제압하기는 커녕 갑옷에 팅겨나가서 별 효과가 없자 점차 홀대되었다. 게다가 개인 및 국가의 경제 능력이 점차 향상되면서 사람이 시위를 당기는 일반 활보다 비싸지만 사용이 쉽고 위력이 강력한 [[쇠뇌]]로 갈아타는 중이었다. 당시 [[제노바 쇠뇌병]]들이 유명했던 것도 이런 이유.[* 이때문에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장궁병들은 완전 정예화가 완료된 병사들이었고 장궁의 엄청난 장력에서 나오는 관통력으로 중장갑 기사단들이 쇠뇌가 아닌 화살에 의해 갑옷이 관통되어 쓰러지자 엄청 당황해했다.] 총기가 보편화된 이후로는 비유럽권 지역에서도 극소수의 전문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열보병]] 시대가 되면 일정 비율의 궁병, 궁기병 편제를 유지하였던 동아시아 지역이나 총기 전래가 아예 되지 않은 오지를 제외하고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전통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던 [[영국]]에선 근대 이후로도 수차례 [[장궁병]] 병과를 부활시키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유일무이한 궁병으로 활약했던 [[잭 처칠]]도 이런 풍조하에 나타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