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궈쑹링 (문단 편집) === 군공을 세우다 === 궈쑹링은 군사 교육에 가장 공을 들였다. 강무당을 정돈하고 군사 교도대 군관 교육반을 창설하여 군사행정, 군의, 군 장비 등을 교육했으며 보병학교도 창설했다. 그리고 학생과 간부들을 훈련시켜 이들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봄과 가을마다 부대 검열을 행했으며 군관들에게 학과와 기술 양과의 기술고시를 보게 했다. 또한 인재들을 모으는데도 열심이라서 군사학교 출신 인재들은 모두 포섭하였고 실력 있는 자를 중심으로 승진시켜군관 승진제도를 수립하였다. 군수독립제도도 만들어 공금 횡령과 군수품 착복을 방지하고 병사복지를 향상시켰다. 또한 부하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봉건적 풍습을 없앨 것을 지시했고 구타, 횡령, 아첨 등의 기풍을 일소하였다. 이런 과감한 개혁으로 3여단과 8여단은 봉천군에서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거듭났다. 궈쑹링을 시기한 마적 출신 지휘관들은 훈련이 잘 된 부대는 군기만 잘 잡혀 있지 실전에서 쓸모 없다고 주장하며 궈쑹링을 비판했지만 이는 군사학교 출신들은 실전에 약할 것이라는 마적 출신 지휘관들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장쉐량은 봉천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쉐량은 일부 부대만 봉천에 남기고 주력 부대를 이끌고 산해관 너머로 진군했는데 지휘권을 궈쑹링에게 맡겼다. 궈쑹링은 선봉사령으로 주력을 이끌고 톈진에서 1개 연대 병력으로 용제광의 2개 여단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920년]] 가을, 길림성 동부에서 마적단이 창궐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행패를 부리자 궈쑹링은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부대들을 지휘하여 순식간에 마적단을 궤멸시켰다. 궈쑹링은 자동차나 마차에 타는 것도 거부하고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병사들의 인기를 얻었으며 군기가 엄정한 궈쑹링의 부대는 민중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 지방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궈쑹링은 크게 유명해졌다. 이에 [[장쭤린]]은 [[1921년]] [[장쉐량]]을 봉천 육군 제3혼성 여단장에 임명하고 궈쑹링을 제8혼성 여단장에 임명하여 심양의 북대영에 두었다. 3여단과 8여단의 사무는 실질적으로 같이 처리되어서 3,8 여단으로 묶어서 부르곤 했는데 장쉐량은 웬만한 사무는 모두 궈쑹링에게 맡김으로 궈쑹링이 사실상의 책임자가 되었다. 장쉐량과 궈쑹링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 둘이 의형제를 맺기까지 하였다. [[1922년]] 4월,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봉천군은 동로군과 서로군으로 나뉘었다. 동로군 2부대 사령관이 [[장쉐량]]이었고 여기에는 3여단, 8여단과 더불어 채평본의 4여단이 있었다. 1차 직봉전쟁에서 봉천군의 서로군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이 때문에 동로군도 위험해졌다. [[장쭤린]]은 [[장쉐량]]에게 전보를 쳐서 군량성의 본부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했고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지휘를 맡겼다. 서로군이 궤멸하자 [[장쭤린]]은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위기 상황이지만 궈쑹링은 침착하게 지휘권을 행사하여 직예군의 추격에 능숙히 대처하며 영정하 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2부대 병력을 모두 보전하여 주둔지로 퇴각시켰고 산해관에서 직예군을 섬멸함으로 만주에 직예군이 침입하는 것을 저지했다. [[장쭤린]]은 자신의 휘하 장령과 부대들이 군사학을 모르는 형편없는 상황이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군을 정돈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능숙한 모습을 보인 궈쑹링이 [[장쭤린]]의 주목을 받았다. [[장쭤린]]은 봉천, 길림, 흑룡강의 3성 부대를 모두 동북군으로 통합하고 사단제를 폐지하고 여단제로 개칭했다. [[장쉐량]]의 3여단은 2여단으로, 궈쑹링의 8여단은 6여단으로 개편되어 2,6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쭤린]]은 [[궈쑹린]]에게 육군정리처 대리참모장 자리를 주어 핵심사무를 맡겼고 궈쑹링은 봉천군의 인사권을 사실상 전담하는 막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길림과 흑룡강, 그리고 녹림파라 불리는 원로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제외한 사실의 모든 동북군이 궈쑹링이 지휘하여 궈쑹링은 봉천군벌의 군사대권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점에서 궈쑹링은 육대파라 하여,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한 유위, 유익삼, 제운, 범포강, 유진동 등의 장교들을 이끄는 봉천군벌 3대 파벌의 우두머리로까지 성장했다. 육대파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양위팅]]의 사관파와 대립하며 서로를 매우 싫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