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궈쑹링 (문단 편집) === [[반봉사건]] ===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궈쑹링은 3군단 부군장에 임명되었는데 3군단은 강등성, 한린춘이 지휘하는 1군단과 묶어 1,3연군이라 불리며 동북군의 주력부대였다. 1,3연군을 지휘하기 위해 연합사령부가 설치되고 위익삼이 총참모장이 되었는데 실세는 궈쑹링이었다. 궈쑹링은 1,3연군을 지휘하여 크게 이겼으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11월 24일 취임한 임시집정 [[돤치루이]]는 자파의 세력확대를 위해 [[루융샹]]을 직예독판에 임명했는데 이 지역을 탐낸 [[장쭤린]]은 톈진회의를 통해 장강의 안휘군벌 기반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돤치루이]]가 수락하면서 직예독판은 [[리징린]]으로 교체되고 [[장쭝창]], [[루융샹]]의 연합군이 [[제노전쟁]]을 통해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축출하고 강소, 안휘를 점령하여 루융샹이 강소독판, 왕읍당이 안휘독판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강절전쟁]]으로 세력이 다 무너진 [[루융샹]]과 왕읍당을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8월에 물러나게 되었다. [[장쭤린]]은 궈쑹링을 안휘독판, [[장덩쉬안]]을 강소독판에 임명하려 했으나 [[양위팅]]이 강소독판 자리를 요구하자 [[양위팅]]에게 강소독판 자리를 주고 [[장덩쉬안]]을 안휘독판으로 이동시켰다. 이미 심복인 팽진국을 안휘군 참모장으로 임명하면서 취임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궈쑹링은 이에 대단히 실망했다.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때가 되면 [[흑룡강]]이든 길림이든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달랬지만 [[손봉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장쭤린]]과 궈쑹링의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궈쑹링은 장쭤린의 관내 진출에 대해 반대했다. >"우리들이 있는 이 동북지역은 드넓은 땅이 있어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인구는 3천만명이 넘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이번 관내 진격은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이미 참패하여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하였는데 다시 거병하여 남하하면 이긴다 해도 뭇 사람의 비난이 되고 진다면 장군님의 명성만 더럽힐 것입니다. 관외에 있으면서 변화를 엿보는 것만 못합니다. 실력을 더 기르고 나서 다시 통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궈쑹링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야심가 [[양위팅]]은 비옥한 강남을 정벌하여 중국 통일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고 [[장쭤린]]은 이를 솔깃하게 여겨 장강으로 진군하였으나 [[쑨촨팡]]의 오성연합군 때문에 곧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장쭤린]]은 수습을 위해 궈쑹링을 보냈으나 [[1925년]] 10월 일본 방문에서 [[장쭤린]]이 일본과 매국적 밀약을 맺었다고 확신한 궈쑹링은 [[한푸쥐]]를 통해 [[펑위샹]]과 합작하여 [[장쭤린]]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1925년 11월 23일, 궈쑹링은 도리어 장쭤린에게 맞서는 반란을 일으켰다. 자세한 것은 [[반봉사건]]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