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귤 (문단 편집) == 역사 == [youtube(fdOybaeZ1OU)]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안영]]은 귤이 [[회하]]([[淮]][[河]])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는데 이를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남귤북지]]([[南]][[橘]][[北]][[枳]])'.[*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초령왕이 제나라 출신 죄수가 죄를 지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제나라 사람들은 다 얘처럼 도둑놈인가봐요?"라고 디스하자 이에 받아친 말에서 유래되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법이라더니, 초나라 사람들은 풍속이 별로인가 봅니다." 사람이든 과일이든 종자보다 자라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고사성어.][* 사실 귤과 탱자는 다른 속에 속하기 때문에 위치가 바뀐다고 귤이 탱자가 된다거나 탱자가 귤이 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 또 [[삼국지]]의 등장인물 [[육적]]은 모친을 위해 [[원술]]의 귤을 빼돌린 [[회귤유친]]의 일화가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귤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재배해왔으나 한반도 본토에서 기르기 힘들어, 제주도 정도를 제외하면 왕족이나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탐라지에 따르면 백제 문주왕 2년(476) [[탐라국]]에서 지역 특산물로 귤을 바쳤다고 하며, [[고려사]]에 고려 [[문종(고려)|문종]] 6년(1052)에 탐라국에서 세금으로 받아오던 귤의 양을 늘린다는 부분이 있어 이때부터 귤을 진상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8년(926)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때부터 감귤을 진상했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조 원년(1392)부터 공물 기록이 계속 나온다. 세종 8년(1426)에는 호조의 게시로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에 유자와 감자를 각 관서에 심게 했다고 한다. 세조실록 2권에는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귤이 그만큼 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귤을 왕실 전용 온실에서도 길렀다는데 [[세종대왕]]이 총애하는 후궁한테 직접 귤을 준 이야기, [[문종(조선)|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귤을 내렸는데 학사들이 귤보다는 접시에 문종이 친필로 쓴 시를 더 탐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매년 '황감제(黃柑製)'라 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감귤을 하사하고 치른 시험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책을 빌려줬다고 고맙다는 편지와 같이 귤 3개를 같이 보내준 양반이 있었는데 그 귤을 받은 양반이 "이렇게 귀한 것을!" 놀라서 무척 고마워했다는 일화가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로 귤은 비싸고 쉽게 구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도 비슷해서 '''한때 귤은 쌀보다 비쌌다.'''[* 그 무렵에 제주도 사람들은 귤 나무 한 그루 잘 키우면 애를 대학까지 공부 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포도]] 역시 과거 귀족들의 사치품이었고, 이들이 궁중에서 한가로이 포도를 까서 드시는 게 [[스테레오타입]]이자 [[클리셰]]였다.] 그래서 [[4.19 혁명]] 당시 [[이기붕]]의 부정축재를 깔 때 그의 집에서 귤 한 박스가 나온 것이 언급되기도 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허구연]]이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귤이 없었다는 말을 했지만 당연하게도 사실이 아니다.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는 뉘앙스였다면 모를까.] 하지만 현재는 워낙 과잉생산 되는데다 경제발전으로 사람들의 소득수준이 올라갔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제주도 외 남부지역까지 재배가능지역이 넓어지기까지 해서 제철이 되면 장바구니에 담기 가장 만만한 싸디 싼 과일로 등극. [[다국적 기업]]의 힘으로 재배, 가공되어 들어오는 오렌지 주스보다 국내산 가공품인 제주감귤 주스가 가격이 1/3 정도 쌀 정도니까 말 다했다. 조선시대의 제주도산 귤 품종과 현재 제주귤 품종은 다르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제주풍토기」에는 제주도에 14종의 재래종 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4종은 현재 도련동에 6그루로 남았다.] 당시 제주도 및 남해안에서 기르는 귤은 다 진상품으로 바쳐야 했는데, [[정약용]]의 기록에서 여름에 귤이 녹색으로 작게 열리면 나무둥치에 몇 개인지 표시해 놨다가 귤이 익으면 그 양만큼 바쳐야 해서, 바람에 떨어지거나 하면 다른 곳에서 사서 바쳐야 하는 등 그 부담이 컸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관리들의 수탈도 있어서 결국 이에 시달리다 못한 농민들은 일부러 귤나무를 죽이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오기까지 [[제주도]]가 받은 차별대우는 상당했다. 제주도민은 함부로 내륙을 오갈 수도 없었고, 폐쇄적인 환경 때문에 종종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심한 착취]]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귤도 그런 수탈의 연장선상. 실제로 신세 한탄조로 '귤나무 밑에 풀독을 부으러 간다~' 하는 민요가 나올 만큼. 제주도민이 내륙으로 못 가게 한 것은, 내륙에 비해 제주도가 살기 힘들기 때문에 인구감소를 막으려고.] 제주도민들이 좋은 토종귤 품종을 다 죽이다보니 토종귤의 품질이 낮아졌고, 개량종에게 자연스럽게 밀려난 뒤에는 현재도 제주 전통귤은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보기 힘들지만 한방에서는 약귤이라고 토종귤을 쓰기도 한다. 제주 재래귤 품종 가운데 하나인 동정귤(洞庭橘)은 [[멸종]]했다고 알려졌었으나 [[애월읍]] 광령리에서 수령이 200년이 넘는 나무가 한 그루 발견되었다. 그나마도 [[제주 4.3 사건]] 때 불나서 고사할 뻔했다고. 또다른 제주도의 토종귤로는 청귤이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자생해온 재래종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시중에 나오지 않고 감귤연구소나 감귤박물관[* 이 박물관에는 2020년 기준으로 무려 126년이나 된 하귤나무가 있는데 과거 1894년 김병호 선생이 [[김홍집]] 총리 대신에게 선물받은 것이라고 하며, 이후 2017년 김병호 선생의 증손인 김성보 서귀읍의회 의장의 유가족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에서 보존용으로 10그루 내외만 자생한다. 현재 우리가 자주 먹는 귤 품종은 중국 [[저장성]]의 [[원저우]] 밀감[* 흔히 온주(溫州)밀감으로 부른다.]이며 일본 규슈로 건너가 씨가 없는 감귤로 개량된 품종으로 [[재일교포]]들이 친척에게 보내준 묘목에서 조금씩 생산하기 시작해 제주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산 귤이 유통되었으나 그 이후 일본산 귤이 수입되지 못한 영향이 컸다. 사실 제주도에 원저우 밀감을 도입한 사람은 20세기 초 [[프랑스]] 출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에밀 타케(Emile Taquet, 1873~1952) 신부다.[* [[이재수의 난]]으로 파괴된 제주 신앙공동체를 회복하는 등 선교사로서의 활동도 많았지만 식물학자로 더 유명한 사람이며 [[왕벚나무]]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한국명은 엄택기.] 1911년 타케 신부는 [[일본]] [[아오모리]]에서 선교하는 위르뱅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 묘목을 보낸 답례로 온주밀감 묘목 14그루를 받아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면형의 집’에 심었다.[* 타케 신부가 심은 최초의 원저우 밀감 중 하나는 2019년까지 살아있었다.] 제주에서는 에밀 타케 신부가 심은 때를 기해 제주 감귤 100주년 행사를 기획한 적도 있었지만 윗사람이 바뀌고, 토종귤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α 해서 무산되었다. 한편 타케 신부의 온주밀감이 잘 크는 것을 본 일본인 미네(峯)가 1913년 온주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 현재 제주농원인 서귀읍 서홍리에 심어 대량 상업화를 시도한다.[* 이 농원에는 이후 심은 하귤(夏橘), 워싱톤네블, 기주밀감, 문단 등의 품종이 남아있다.] 또한 일본인 미네는 조선인 박영효와 함께 온주밀감뿐 아니라 워싱톤 네블,[* 일본산 워싱톤 네블은 1909년경 서귀포 출신 김진태라는 농민이 처음 재배했다고 한다.] 하밀감(夏蜜柑) 등을 1910년경 전파하면서 1920년부터 매년 귤나무 7천~8천 본이 일본에서 제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감귤 묘목이 제주에 도입되었지만 농가에서 재배가 활성화되지는 않았고 정원수로 몇 그루 정도 심어진 것에 그쳤다고 한다. 이에 일본인 중심의 농민회가 감귤 묘목을 나눠주며 생산량을 늘리려 했지만 이미 일본에서 생산된 감귤이 자유롭게 들어왔기 때문에 제주감귤이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어 판매 판로가 뚫리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우장춘]] 박사가 감귤의 품종 개량을 시도하였지만 [[한국 전쟁]]으로 혼란한 와중에 무산되었고, 제주에서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이 터지면서 농민들이 생활터전을 잃어 감귤재배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1955년에야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감귤묘목이 도입되었다. 제주도의 감귤재배가 확산되는 계기는 1964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순시에서 제주도의 감귤을 중점적으로 키우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이듬해 1965년부터 감귤심기 붐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 농림성으로부터 감귤 묘목을 수입해 농가에 보급하였다. 과거 귤나무는 키가 커서 사다리를 타고 귤을 수확해야 했는데, 현재의 관목처럼 키가 작은 귤나무는 바로 이때 일본에서 도입된 것이다. 1975년 제주도 감귤재배면적이 1만 ha에 달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2만 5000여 ha에 감귤 생산량은 60만 톤에 이르렀다.[* 1945년 당시 감귤 재배면적이 16ha, 생산량은 80여 톤에 불과했음과 비교하면 실로 놀라운 성과다. 심지어 감귤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던 1960년에도 재배면적은 193ha, 생산량은 190톤에 불과했다.] 이후 생산량은 60만 톤 내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일본에서 '스다치'라는 품종이 제주도로 들어왔는데 제주도의 옛 이름 [[영주10경|영주]]를 따서 [[영귤]]이라고 불렀다. 영귤은 크기는 탁구공만 하고 겉껍질이 초록색이라서 청귤, 풋귤과 헷갈릴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감귤 품종이다. 1998년부터 [[UPOV]]가 발효되어 [[지적재산권]]이 강화된 바람에 일본으로부터의 신품종 도입이 어려워지며 로열티를 물어야 하기에 독자적 품종개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수입 오렌지와의 경쟁도 불가피해졌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북한]]에 감귤보내기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2010년 북한이 [[천안함 피격 사건]]을 일으킨 이후로 중단되었다. 2012년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미국산 만다린의 관세율이 2012년 144%에서 점점 낮아져 2021년 기준 48%까지 내려갔고 2026년 완전 철폐 예정이라 제주도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 때 북한이 선물로 보내줬던 [[송이버섯]] 2톤의 답례로 청와대에서 귤 200톤을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보냈다. [[https://news.nate.com/view/20181114n06259|#]] 참고로, 북한에서 귤은 기후때문에 재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에서 귤을 수입해 먹는데, 중국산 귤은 북한 기준으로 가격대가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못먹고,[* 북한도 교육과정에서 남한지역의 지리를 가르치고 이때 남부지방의 특산물에 관한 내용도 다룬다.] 평생 못 먹어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선물용으로 애용된다, 이게 남으면 측근들에게 선물 형식으로 하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