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린란드 (문단 편집) === 근대 이전 === 아주 오래 전 이주해 온 사람들은 [[이누이트]]로 그린란드 남부에 사카크(Saqqaq) 문화를 이루었고 북부에선 인디펜던스 문화가 존재했다. 이후 이들이 사라지고 그린란드 서해안의 도싯 문화와 북부의 인디펜던스-2 문화가 나타났으며, 훗날에는 [[바이킹]]이 이 섬에 들어왔다. 그린란드 땅의 99%는 얼음으로 뒤덮였지만 1%는 양과 소를 기를 수 있을 만큼 풍요롭고 한적한 풀밭이었고, 에이리크 라우디[*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유럽|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사람인 [[레이프 에이릭손]]이다.]가 처음 도착했다고 알려진 브라타홀리드는 풍경이 꽤 전원풍이다. 실제로 당시의 그린란드는 온난화에 의해 최근에 비하면 꽤 따뜻하고 그럭저럭 소와 양을 키우며 살 수 있을 정도의 풀밭도 있었다. 이런 [[바이킹]]의 팽창은 이러한 북방의 온화한 날씨와도 연관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육지인 [[피어리랜드]]에도 사람이 거주한 적이 있었다.]. 거꾸로 바이킹의 몰락은 돌아온 [[소빙하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풍부한 숲과 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 종종 [[북아메리카]] 본토까지 찾아가야 했고, 그 과정에서 [[빈란드]]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바이킹들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백 년 먼저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것은 문헌 기록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오늘날 분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지리학적으로 그린란드 자체가 북아메리카의 일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유럽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북아메리카([[캐나다]]의 일부)를 잘 알았던 셈이다. 실제로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뉴펀들랜드]]에서 [[북아메리카]] 본토의 [[래브라도 반도]]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무력 충돌에 의해 정착하진 못하고,[* 이때까지의 역사를 다룬 [[바이킹]]의 서사시인 [[빈란드 사가]]에 의하면 이때 바이킹들과 무력 분쟁을 일으킨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스크렐링]]이라고 하는데, 주류 [[역사학|역사학계]]는 이들의 정체를 [[틀링깃|틀링깃족]]이나 [[베오투크|베오투크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끔 부족한 목재를 보충하러 갔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역도 했는데 원주민들에게 우유와 옷감을 주고 모피를 받아갔다고 한다. 나중에는 래브라도 해안까지 가서 나무를 캤는데, 여기서 [[노르웨이]]의 구리나 철 조각, 심지어는 노르웨이 왕 올라프 3세의 치세(1067~1093)에 주조된 은화가 발견됐다고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일대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의 [[하플로그룹]] 분석에서 [[바이킹]]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인류학|인류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냈는데, 당시 이 지역의 주민들이 외부인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고,[* 당장 자기들끼리도 극심한 무력 분쟁을 일으켰는데, 가령 [[바이킹]]과 조우한 민족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틀링깃|틀링깃족]]은 인근의 [[베오투크|베오투크족]]을 공격해서 절멸 직전까지 몰아붙였고, 그 베오투크족은 뒷날 현대 [[캐나다|캐나다 연방]]의 전신이 되는 [[영국령 캐나다]] 시기에 [[영국인]] 이민자들의 마을을 약탈하다가 역으로 [[영국군]]에게 개발살나서 20세기 초에는 생존자가 달랑 한 명만 살아남았을 정도로 몰락해 멸족당했다. 현지의 [[이누이트|이누이트족]]도 자매 민족인 [[유픽|유픽족]]이나 이웃한 [[크리|크리족]], [[오지브와|오지브와족]]과는 각각 [[미국]]과 [[캐나다]], [[덴마크]]에 나뉘어 합병당하기 전까지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냈다.] 때문에 전쟁 포로로 잡힌 바이킹들을 학살하거나 [[식인|잡아먹어버림으로서]],[* 고대 헤로도토스의 묘사나 중세 핀란드 관련 역사 기록을 보면 혹한지에 거주하는 부족들의 식인 행위와 관련된 묘사가 흔한 편인데, 이런 지역은 포로를 먹여살릴 잉여 식량이 부족한데다가 노예제도가 있던 것도 아니라 포로를 잡으면 인육으로 조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자간의 인적 교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몇백 년 동안 계속 거주했고 한때는 [[바다코끼리]]의 어금니(사치품인 [[상아]]의 대용품) 수출[*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중동 침략으로 인한 전쟁 탓에 유럽으로 유입되는 아프리카산 상아의 교역로가 차단된 상황이었다.]로 번영하여 [[가톨릭]] 주교구가 설정될 정도로 성장했으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바다코끼리 사냥이 점점 힘들어지고 가축을 키우기도 어려워지면서 차차 인구가 줄어들었으며, 15세기가 되면 기후변화가 더욱 심해지고 [[유럽]]과의 교류마저 중단[* 14세기 중반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유럽에서 사치품인 상아의 수요도 급락하였고 유럽의 사치품 수요가 회복될 무렵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맘루크 왕조]]와의 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는 아프리카산 상아의 교역로를 복원하면서 그린란드의 경제적 번영의 큰 요인이던 바다코끼리의 어금니에 대한 수요가 극심한 타격을 입었으며 여기에 기후변화로 북대서양 항해의 위험도가 급증하여 결국 15세기가 되자 경제적 이득은 매우 적고 심지어 위험하여 지속적으로 무역선의 침몰이 일어나는 그린란드 항로로 오는 유럽의 무역선은 없어지게 된다.]등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406년에 아이슬란드의 상인인 토르스타인 올라프손이 노르웨이를 떠나 아이슬란드로 가다가 악천후로 항로를 이탈해서 그린란드에 도착하고 1408년에 그린란드 현지의 바이킹 여성과 그린란드 현지에서 결혼한 후 1410년에 그린란드를 떠나서 아내와 함께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후에 이 결혼 사실을 서류로 교회에 제출하면서 문헌 기록상으로 1410년까지 그린란드의 바이킹이 아직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고고학적 및 유전학적 조사 결과 이들이 이 섬에서 몰락했다기보다는 [[아이슬란드]]로 질서정연하게 이주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 근거로 오늘날 [[아이슬란드인]] 중 소수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와 일치하는 모계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학계에선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고 있다.[* 당시의 기후 변화는 그린란드만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나 아이슬란드에도 큰 영향을 주어 이 곳들도 식량 부족으로 인한 상당한 인구 감소가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인 아이슬란드가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의 질서정연한 이주를 받아주는 것은 식량 부족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주를 해야할 정도로 생활 환경이 악화된 시기엔 이미 그린란드에는 근해에서 생선을 잡는데 쓰는 작은 어선들 외에는 대양을 항해할 배가 남아 있지도 않았고 게다가 기후변화로 작은 어선 정도의 배로 그린란드에서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항해의 위험도가 매우 심해진 상태여서 대규모 이주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슬랜드에서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린란드의 바이킹 거주지에 이누이트 노예들이 있었다는 문헌 기록이 있고 그린란드의 바이킹들과 아이슬란드의 바이킹들은 15세기에 접어들어 교류가 완전히 끊기기 전까진 교류 과정에서 상대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상대편 지역에서 결혼 상대자를 구해 결혼하는 사례가 문헌에 나타나기 때문에 추정이지만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이 가지고 있던 이누이트 노예들과 혼혈이 있었고 이들 이누이트 노예들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교류가 끊기기 전 시점에 이주나 결혼 등으로 아이슬란드로 옮겨와서 이누이트의 유전자가 아이슬란드인들 중 소수가 가지게 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이들의 거주지의 몰락 과정은 [[미국]]의 [[생물학|생물학자]]이자 [[인류학|문화인류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 중 특기할 만한 점은 그린란드 바이킹들이 몰락 직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린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린란드 유적지에서는 생선뼈와 각종 낚시도구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생선을 잘 먹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로 바이킹들의 유골을 동위원소 분석 방법으로 분석해보면 그린란드 바이킹의 식사 가운데 해산물의 비율이 당초 50% 쯤에서 14세기에는 80%로 높아졌다고 한하고, 또 이 결과가 크고 부유한 농장에서 발굴된 뼈를 가지고 분석해 나온 것인데, 동시대의 작고 가난한 농장에서 발굴된 뼈를 이와 비교해보면 해산물의 비중이 더 높게 나와서 실제 비중은 그 수치보다 더 높을 수 있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문명의 붕괴》에서는 그린란드 바이킹의 해산물 주식은 사냥한 [[바다표범]] 고기인 것으로 보인다고 나타나므로, 식량난에 처하자 생선이라도 찾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적어도 13세기까지 그린란드가 [[노르웨이]]령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서쪽 [[북아메리카]]를 통해 새로 들어온 [[이누이트]]들은 툴레 문화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다시 북쪽에서부터 내려와 16세기 경이면 그린란드 전역을 차지하였다. 1501년에 가스파르 코흐트-헤알이 그린란드에 다시 도착했으나 유럽인이 이주하진 않았다. 1721년에 노르웨이의 선교사 한스 에게데(Hans Egede)가 그린란드의 옛 북유럽인 정착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활동을 위해 그린란드를 찾아가 지금의 [[누크]]인 고드호프를 세웠으며, 그린란드를 노르웨이의 식민지로 삼게 되었다. 당시엔 노르웨이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라는 [[덴마크]] 왕과의 동군연합이었기 때문에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4세]]가 곧 노르웨이 왕이었고 이때부터 사실상(de facto) 덴마크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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