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나라 (문단 편집) === 초기 === 당장 《[[금사]](金史)》 고려전에 대놓고 "금인은 고려의 [[말갈]]에서 떨어져나온 것에 기원한다.'라고 기록되었으며,[* 단, 여기서 칭하는 '고려'가 [[흑수말갈|북흑수]]가 신하를 청한 [[고구려]]였다는 설과 금나라의 시조 [[완안함보]]가 한반도에서 나온 것을 가리킨다는 이설이 있다. 그러나 전자의 설을 따른다 해도 [[윤관]]의 인식이나 [[고려도경]]의 인식에서 나타나듯이 그냥 고구려-고려를 왕조 교체만 일어난 연속체로 보았기에 고려측에서도 여진이라 하면 대체로 원래 자신들에게 복속되어 있던 민족으로 보았다.] 실제로 금나라를 건국하기 전의 여진족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섬겨 왔다. 완안부가 여진족을 통일하기 전까지 여진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고려]]는 그들 중 친고려 성향의 부족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국격을 높이는 한편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완안아골타]]의 숙부인 '''완안영가'''와 아골타의 형 '''완안오아속'''이 완안부의 추장을 맡으며 다른 여진족들을 아우르는 한편 고려의 북방 경계를 위협할 정도로 심상찮아지자 숙종이 여진 정벌을 시도하나 예상 이상으로 완안부의 전력이 강해 성과가 없었다. 이에 고려는 절치부심해서 [[예종(고려)|예종]] 대에 본격적으로 [[고려의 여진 정벌|17만 정도의 대군을 일으켜 여진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바로 [[윤관]]의 [[동북 9성]] 개척(1107년)이다. 그러나 막상 해당 지역은 길이 많아 방어하기 여의치 않은 지형이었고, 근거지를 빼앗긴 여진족 역시 필사적으로 반격하여 1109년 [[갈라수 전투]]에서 고려군을 대파하며 9성 중 2성을 탈환했다. 이에 고려 측 역시 북방에서의 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고, 여진 측 역시 근거지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 [[길주성 전투|길주성 탈환에 실패]]하는 등 지칠 대로 지쳐 결국 '절대로 고려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자신들의 영토를 되돌려받는다. 이렇듯 '영토 확장'이라는 1차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고, 오히려 완안부가 여진족들의 구심점이 되는 데 도움만 되었다며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실패한 정벌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술된 성과가 있긴 했으나, 고려가 상당히 평온한 시기를 거치면서 모아놨던 국력을 한 번에 낭비해 버리고, 가시적인 성과는커녕 외교적인 부분에 효과가 있었다고 자위하는 것은 이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제법 승승장구하던 완안부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음으로써, 여진에 고려의 피해 이상으로 큰 고통과 손실을 가한 것이 효과가 아예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단기적으로는 당시 고려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형식의 화친을 성사시켜 북방 경계를 안정시켰으며,[*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 측에서 화친을 구걸했다고 되어 있으나, 고려사에는 여진 측에서 "땅만 돌려주시면 진짜 기와 하나 안 던질게요. 약속 어기면 우리 후손까지 다 죽어 없어질 겁니다." 맹세하고, 화친이 성사되자 9성 지역에 이주한 고려 백성들을 한 명도 해치지 않고 소와 말들을 내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도와줬다."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여진이 훗날 금을 건국하여 요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과 중원을 아우르는 대국이 되었음에도 고려와는 최대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 한 데에 영향을 미쳤다. 금은 망국의 순간까지 남송이나 몽골과는 싸웠으면서도 고려는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희대의 [[폭군]]이었던 [[해릉양왕]]은 제외한다.][* 남송과 몽골이라는 적들과 싸우는 상황에서 고려를 건드려 전선을 늘리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몽골과 싸우던 와중에도 남송을 치려던 금이었던 만큼 여러 전선을 무조건 피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남송은 이기면 경제적으로 막대한 보상이 들어오는 나라이니 한탕주의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으나 고려는 그 정도의 이익이 달린 나라도 아니었다. 해릉양왕처럼 그냥 대국이 되고 싶으니 고려도 먹고 싶다는 식의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남송이나 몽골과의 전선과는 멀리 떨어진 고려까지 군사를 파견하기란 어렵다.] 금나라를 건국하고(1115년) [[요나라]]를 밀어붙이는 등 세력이 커지자 되려 고려에게 자신들을 형으로 인정하는 형제의 맹약을 요구했다.(1117년) 당시 고려에서는 이를 무시했는데[* 얼마 전까지 신하였던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하기란 명분상 어려웠다.] 금나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영 거슬렸지만[* 되려 예종은 재위 14년(1119년) 8월에 금나라 사신을 보내서 상술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적은 국서에 금 황제를 "너(彼)"라고 칭했고, 당연히 금나라는 사신을 거부했다.] 당장 [[요나라]]와 [[북송]]을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었기에 전반적으로 고려와는 [[여요전쟁|대대적인 전면전]]을 치른 [[요나라]]의 경우와 달리 전면적인 충돌은 없이 지냈다.[* 1124년에 고려가 금의 침입에 대비, 천리장성을 쌓는 등 긴장감이 고조되긴 했다.] 북송을 멸망시킨 이후 대놓고 고려에 사대적 관계를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금 또한 예전에 근거지를 잃었던 뼈아픈 교훈과 남송 전선을 의식하여 별 충돌 없이 지내게 된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 금나라와 고려의 이해 관계가 가장 충돌한 지역은 사실 동북 9성보다도 '''보주(保州),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의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요나라의 멸망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금나라와 고려는 각기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한다. 일단 금나라가 [[요나라]]의 땅이었던 보주 점령에 가까워지자 고려는 즉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보주 반환을 요구한다.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라고 대답한 뒤 즉시 부하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고려가 공격하러 올 것이니 얼른 대비를 해야 된다."라며 경고한다.[*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수국 원년 11월.] 하지만 단순히 "너님들이 가져갈 테면 가져가봐."라고 한 건 아니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 암묵적인 외교 활동의 일환이었다.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가 밀고 내려오자 고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당연히 거부했고, 이후 요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보주 일대를 두고 양 국가가 만나게 된 것이다. 고려의 요구에 아골타는 사신을 통해 직접 탈취하라고 언급했지만, 당시 보주는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요나라]]의 땅'''이었다. 이를 고려 쪽에서 치러 간다면 '''고려는 요나라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작게는 두 나라 간의 연계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고 크게는 우군을 만들려는 금나라의 의중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고려도 이를 파악하고는 '''군사적 움직임보다는 외교적인 움직임으로 먼저 항복을 권유'''하였고 결국 거란족 관리들이 고려에 성을 넘기며(1117년 3월) 보주와 내원성은 고려의 땅이 되었다. 당시 고려가 유연하면서도 이득을 챙기는 외교를 했음을 잘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 사실 당시 성들을 지키던 요나라 관리는 잠깐 성들을 맡기는 것에 불과하니 상황이 진정되면 돌려달라고(...) 하고는 탈출한다. 물론 그 이후 요나라는 아예 멸망해버렸지만... 당시에는 차마 아예 나라가 망해버릴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자세한 경과는 [[의주군]] 항목 참조.] 금나라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 오면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