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나라 (문단 편집) == 문화 == [[중원]]을 정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 후신격 국가인 [[청나라]]는 중원 입관 전에도 요동의 한족을 복속시키고 투항해온 한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유학을 받아들였기에, 중원 입관 후에도 유교 사당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산둥성|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 고경예가 그 광경을 보고 '''"[[공자|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며 뜯어말려서 겨우 무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여진족이 중원에 정착하고 한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가 점령한 곡부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이는 유목민족 출신 정복 왕조의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알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복 왕조의 군주도 유교를 국시로 받아들이고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 대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공자 가문의 정통성이 좀 꼬였는데, 금나라가 중원을 공격하기 직전 공자 가문은 남송 정부와 함께 [[곡부]]를 떠나 남하해서 [[절강성]]에 터전을 잡고, 그곳에서 남송이 부여한 연성공 작위를 얻어서 공자의 후예로 인정받았다. 즉 같은 공자 가문에서 두 명의 연성공이 나오게 된 것. 금나라가 인정한 가문을 '북종', 남송이 인정한 가문을 '남종'이라고 부른다. 이후 쭉 남북종으로 나뉘다가 [[원세조|원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남종 측에게 곡부에 돌아가 가문을 이으라고 명령했으나, 남종 측에서 연성공 직을 반납하고 북종 측에게 본래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 부분은 [[연성공]]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세종(금)|금 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 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당시 금나라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풍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게 되었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후대의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했다. 물론 만주족마저도 청나라 말기 이후로는 옷과 변발을 제외하면 거의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버렸고, 오히려 [[치파오|자신들의 의상]]이 한족 전통의상으로 잘못 알려지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여진 문자]]는 [[세종(금)|금 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며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다.[* [[과거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선발했지만 과거 제도로 등용된 한족 사대부들은 중간직 위주로 등용되었고 최고위직에 등용되기 힘들었다. 최고위직은 10여 개 성씨의 여진족 귀족들이 계속 해먹었다. 금나라 말기까지 한족 사대부들을 중하게 쓰지 않았던 점은 국정의 전문성 향상에 지장을 줬을 뿐 아니라 민족 화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악비]] 등의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한족과의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이렇듯 금나라는 군사력으로는 한족에게 역사상 최초로 중원을 빼앗기고 황족들이 몽땅 다 포로로 잡히는 사상초유의 굴욕을 안겨줄 정도로 강력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차츰 동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하술되어 있듯이 피지배층인 한족들도 지배층인 여진족들의 풍습에 물드는 경우도 있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초창기인 [[태종(금)|금 태종]] 때만 해도 [[완안종필|완안올출]]로 하여금 후손인 [[만주족]]처럼 정복지의 송나라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나중에 가면 1150년에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송]] 황실의 [[면류관]] 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희종(금)|금 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폭군 [[해릉양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세종(금)|금 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금)|장종]] 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일을 교훈삼아서 후금(청)은 강경하게 변발과 만주족의 문화를 고수했지만, 결국 한화는 피할 수 없었으며 청의 몰락과 함께 민족 자체가 동화되었다.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한 금나라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사조영웅전|벙거지를 쓰고 가죽 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 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사극]]인 <[[무인시대]]>에서는 고증에 맞게 금나라 관리들이 송나라식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여진족 고유의 문화 토대 위에 거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다. [[여진 문자]]가 대표적으로 여진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거란 문자]]와 [[한자]]를 사용했었다. 거란 문자나 한자를 참조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면서 거란 문자는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한족화로 인하여 한자를 더 많이 쓰게 되었고 여진 문자는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금나라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 번이나 내렸다. 이는 거꾸로 보면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남송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다.[* 가령 금인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던 [[차]]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 돈이 남송으로 흘러가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차를 재배해봤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서 외면 받고 차 재배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다.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 백성들이 말하길 오랫동안 호복에 익숙해져 제도가 오랑캐처럼 되었다고 언급했다.[*출처 요 금의 역사<이계지 저>][* 다만 금나라 여성 의복은 한참 철지난것 처럼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남송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보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연운 16주|연운]] 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 전통적인 한족 의상은 우임이다.]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 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한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 원시적 수렵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과 달리 [[거란]]은 금이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다.]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여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 농경민이었던 한족과 발해인을 다스리던 곳.] 의상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변발]]의 경우 발굴 유물과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희종(금)|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고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장종의 경우 그 솜씨가 [[북송]]의 [[휘종(송)|휘종]]과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문학은 많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취했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온다.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 등 금나라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다. 전각([[벽돌]]에 [[조각]]이나 [[부조]]를 세기는 것)공예가 발달되었고, 무덤은 여러 조각들을 새긴 벽돌로 구성되기도 했다. 송나라의 영향으로 도자기, 칠기도 발달되었다. [[대승불교]], [[유교]], [[도교]], 여진족 고유 토속신앙 등을 주로 많이 믿었으나, 일부 [[무슬림]]들도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