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융실명제 (문단 편집) == 준비 == 일단 금융실명제 자체는 김영삼의 대선 공약이었다. 부작용과 실행의 어려움 때문에 실제로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나, 김영삼은 취임과 동시에 [[하나회]]도 날려 버린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금융실명제 역시 하나회 숙청과 유사한 형태로 진행했다. [[강경식(1936)|강경식]] 경제부총리나 [[영식]] [[김현철(1959)|김현철]]이 언급한 것처럼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려면 집권 1년차에 [[긴급명령]]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처리를 확정지은 것이 집권 후 4개월 만인 1993년 6월 말이었다. 이후 김영삼은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장관을 불러서 금융실명제를 극비리에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보안이 새면 당장 2명의 목부터 날리겠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후 2명은 그날로 특별팀을 조직해서 보안 유지 전쟁에 들어갔다. 총괄을 담당한 이경식 부총리는 강남 대치동에서 [[한국개발연구원|KDI]]와 함께 초안을 잡았고 홍재형 장관은 차관급 이상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김용민 세제실장이나 [[김진표]] 세제 심의관을 포함한 실국장급만 모아서 새로 마련한 [[과천시]] 사무실[* 과천 주공아파트 506동 304호를 3개월 간 임대해서 사용했다고 한다.]에 틀어박혔다. 이 특별 팀은 1개월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면서도 꼬리가 잡히면 안 되기 때문에 해외출장을 한다면서 '''일본으로 출국했다가 극비리에 귀국'''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트렁크 끌고 공항으로 갔다가 그 자리에서 사무실로 유턴하는 것은 양반이었다. 해외에서 거는 척하고 안부전화도 걸었다고 하니 보안유지 하나는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김진표 역시 장인어른이 여전히 차명계좌를 보유 중이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알리지 않아 장인이 불평했다고 하니 정말 철통 보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말 한마디와 각각의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위가 수상하다고 눈치챘다면 장인어른이 자신처럼 똑같이 차명계좌를 보유 중이던 지인들한테 자신의 사위가 갑자기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상하게 보이니 지금까지 나라에서 그렇게 실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책을 기어코 실행하게 될 지도 모를 것 같다고 알려줘 버릴 게 분명했다. 이렇게 당장에 맡은 업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유추가 될 만한 비밀의 실타래를 흘리다보면 결국에는 실명제를 시행하기 위한 계획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 뻔하니 어떻게든 숨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이 되자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다. 하지만 하나회 숙청 때와 마찬가지로 정보는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국무총리]]였던 [[황인성(1926)|황인성]]도 금융실명제를 추진한다는 정도로만 알았지 세부내용은 몰랐고 [[박재윤]] 당시 경제수석은 금융실명제에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해서 애초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아예 실시하지 말자는 쪽은 아니었고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할 때 시행해야 부작용이 없으리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D-Day 설정. 원래 계획하기로는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은행에 준비할 여유를 주고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웬걸, 하필이면 일요일이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그렇다고 1주일을 더 미루면 보안이 약해질 위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앞당겨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금융실명제 실시 바로 전날이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마지막 날이었다. 김영삼은 자신과 자신의 일가족이 보유 중이던 재산 목록들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매우 철저하게 진행할 생각이었고 금융실명제는 이와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현철이 [[http://ilyo.co.kr/detail.php?number=58810/|증언]]한 김영삼의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에 대한 입장은 꽤나 강경하였다. >잘 들어봐래이. 중국에서 [[국부천대|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장개석]] 총통이 부패를 바로 잡을라고 본보기로 잡은 게 [[며느리]]였다카이. 정치권에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장개석이가 집을 급습해가 수색을 한기라. 수색을 해보니까 진짜로 보석이 엄청 나왔다는 거 아이가. 그 날 이후로 장개석이가 며느리를 불러가 '이게 마지막 식사'라며 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아나. 권총인기라 권총.[* 여기서 장제스가 부패한 며느리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설은 김영삼 정권 이전부터 돌던 오래된 설이다. 실제로 장제스의 며느리 중 스징이(石靜宜, [[장웨이궈]]의 첫번째 아내)는 매우 사치스럽고 교만해서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는데 1953년 [[의문사]]하자 장제스가 살해했다는 설이 크게 돌았다. 장제스 정권 시절인 1962년부터 1970년까지 8년간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김신]]은 자서전에서 이 설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장경순(1922)|장경순]] 전 [[대한민국 국회부의장|국회부의장]]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06100045|같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