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해금 (문단 편집) == 일본의 금본위제와 금해금 논의 == [include(틀:국내외 주요 금융 위기)] 일본의 금본위제는 19세기 말에 확립되었다. 첫 시도는 1871년(메이지 4)의 「신화조례」 제정이었는데, 이때 신 화폐단위로 [[일본 엔]]을 결정하고 금본위제를 시도하였으나, 경제기반이 약했던 상황이다 보니 정화인 금화의 유출이 계속되면서 은본위제로 전환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인 1897년(메이지 30)부터야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체택하였다. 이때 금태환 비율도 화폐법으로 고정시켰는데, 1엔 = 0.75g이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1달러 = 약 1.5g 정도의 교환비를 보였기 때문에 엔과 달러의 교환 비율(환시세)은 1달러 = 약 2엔(정확하게는 100엔=49.85 달러)로 고정되는 고정환율제가 실시되었다. 이것이 일본 경제사에서 소위 말하는 '''"구 환율평가"(구평가/旧平価)'''이다. 제노바 회의에서 열강들은 조속한 시간 안에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결의되었을 때, 일본의 입헌 정우회 정권([[하라 타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은 [[북양군벌]]에 지원을 하기 위한 차관과 국내에서의 적극적 재정정책을 위해 금해금을 연기하였다. 이는 1차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에 전후불황이 몰아닥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금해금을 연기하는 중에도 [[무역수지]]는 적자를 보고 있었고 환시세는 구평가의 그것을 한참 밑돌았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의 일본 정부 자산을 매각하고 금을 매각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관동 대지진]]은 문제를 더욱 키웠다. 관동대지진의 복구와 그에 따른 국내경기부양 및 금융 조치가 필요해지면서 금수출해제는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엔화가치의 하락은 과도한 수입 부담을 불러와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금 수출 해제와 긴축정책으로 지진재해 어음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경제공황을 불러와서 적극재정을 추구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성립되기도 하는 등 이 시기 일본은 금 수출 해제라는 과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골머리를 앓았던 상태였다. 1928년 프랑스가 금해금을 결정하면서 5대 열강의 일원 중 금해금을 하지 않은 국가는 일본 밖엔 남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국제적인 압력이 심해졌다. 또한 [[도쿄]], [[오사카]]의 어음교환소와 도쿄 상공회의소에서도 지속적으로 금해금을 결정해 달라는 청원이 이어졌다. 거기다가 1930년 설립을 앞두고 있었던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출자국이 되는 조건과 국제연맹 재정위원회 구성국 요건에도 금 수출 해제가 들어가게 되면서 금해금은 일본에게는 피할 수 없는 당면과제가 되었고, 결국 다나카 내각에서도 대장성 재무관을 외국으로 파견하게 된다. 문제는 환시세였다. 구평가의 1달러 = 약 2엔의 교환비는 1920년대 말에 와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된 상태였다.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1달러 = 2엔 63전 내외까지 떨어졌던 환시세가 1928년에는 1달러 = 2엔 30전(100엔 = 44달러) 내외까지 올라오긴 하였으나 구평가의 그것과는 여전히 가치 차이가 컸다. 따라서 일본 경제계에서는 과연 구평가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자체적인 엔화의 평가절하 후 해금해야 한다는 신평가 해금론으로 가야 하는지 논쟁이 벌어졌고, 신평가 해금론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금해금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장작림 폭사사건으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중지되고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이 성립된다.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재정정책을 관장하는 대장대신으로는 전 일본은행 총재인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1869 ~ 1932)[* 1932년 혈맹단 사건에 휘말려 오누마 쇼우(小沼 正, 1911 ~ 1978)에게 살해당한다.]가 임명되었다. 이노우에는 이미 앞서 1923년 대장대신을 지냈던 적이 있었다. 본디 해금을 반대했던 그는 금본위제 복귀가 시대의 조류라고 보고 전격적으로 금해금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 교환비는 한참 의론이 모아지던 신평가가 아니라 기존의 구평가를 되돌리자는 구평가 해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