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해금 (문단 편집) == 농촌경제의 붕괴와 군부 폭주의 기반 형성 == 쇼와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농촌이었다. 당시 일본의 농촌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비단]]을 만드는 양잠업이었는데,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완전히 박살났다.''' 농촌 경제가 박살이 나면서 소작쟁의가 1931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고, 궁핍한 농가는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딸을 사창가에 팔아가면서 근근히 살아나갔다. 이는 금해금을 주도한 당시의 정당정치에 대한 증오가 농가에서 양산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일본 군부에서 가장 우수한 인적자원으로 여긴게 바로 이 농가의 청년들이었다.''' 즉 일본 군부에서 우수한 인적자원으로 여기며 징병한 농촌 출신 사병들 사이에 정당정치에 대한 극한의 증오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일본 청년 장교진의 폭주를 든든하게 지지한 것은 바로 이 [[쇼와공황]]으로 당시의 정당정치를 증오하고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병들의 적극적인 협조였다.[* 이런 군부의 폭주는 신음하던 농촌경제에 최악의 결정타를 날린 결과를 낳게된다. 만주사변에 대한 항의로 미국에서 일본산 비단의 수입금지, 일명 Silk boycott이 시작되어, 그 결과 일본의 양잠업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물론 농촌경제만 이런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다. 민영공장의 노동 인원지수는 1929년의 91.1에서(100이 max) 1930년에는 82.2, 1931년에는 74.4로 쭉쭉 내려갔고, 실수입 임금지수도 1929년의 103.9에서 1930년의 98.7, 1931년에는 90.7으로 심각한 임금삭감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실업자가 만연하고 실업자가 아니라도 임금이 팍팍 내려가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끌어오르는 상태였다는 것. 국가적으로 봐도 일본의 GNP는 1929년의 13,941백만엔에서 1930년엔 11,245백만엔, 1931년에는 10,678백만엔까지 감소하고 주가지수는 1929년의 104.5에서 1930년에는 71.5, 1931년은, 53.0까지 폭락하고 만다.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당시 정부에 대한 큰 불신을 안겨주었고, [[만주사변]]과 [[5.15 사건]]에서 보여주는 군부의 폭주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행하게 되는 주요한 동기가 된다.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적극적인 재정을 하도록 만들었고, 적극재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아진 경기는 국민들로 하여금 '''이 심각한 경제위기에서 정부는 아무것도 안하는데 군부가 열심히 일해서 해결해 준다&해결해 주려 하고 있다'''는 여론을 형성하면서 대대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 결과적으로 금해금으로 인해 일본 군부의 폭주가 일어난 기반이자 폭주 증폭의 요소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금해금만으로 군부 폭주가 일어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