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국공주 (문단 편집) == 생애 == 1215년, 몽골군이 중도 대흥부(오늘날의 북경)를 포위했다('''중도 공방전'''). [[선종(금)|금 선종]]은 배상금 지불 및 황실 여인과의 결혼을 제안하며 항복의 뜻을 밝혔고, [[칭기즈 칸]]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미혼인 금나라 공주는 총 일곱 명이 있었는데, 금나라 황실은 논의 끝에 폐제의 딸, 기국공주를 몽골에 시집 보내기로 했다. 기국공주의 행차에는 대장 10인, 병졸 100인, 시동•시녀 500인, 옷감 3,000 필, 말 3,000마리,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금•은•옥기가 [[지참금]]으로 보내졌고, 공주의 어머니 흠성부인 원씨도 동행했다. 몽골인들은 이들 일행을 매우 후대했고, 기국공주는 "공주 카툰"이라고 불렸다. 서열은 [[보르테 우진]], [[우와스 쿨란]], [[타타르 예수이]] 다음가는 4위였으며, [[타타르 예수이]]의 여동생이자 제3오르도를 같이 관리하던 제5황후 [[타타르 예수게]]보다도 서열이 높았다. 제4오르도(내명부)를 관리했는데, 오르도 하나를 맡아 관리하던 유일한 非 몽골인 황후였다. 자식은 없었으나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 칸]]이 계승권 전쟁을 벌일 때(1259년-1264년)까지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