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뢰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8세기 [[이슬람]]군이 [[유럽]]으로 쳐들어올 당시에도 [[동로마 제국]]에서 만들어낸 하늘의 불이라는 이름으로 쓰이던 것과 같이 [[바다]]에서도 이슬람군의 전투선이 닿으면 불이 붙었다는 기록이 있다. [[14세기]] [[중국]]에서도 [[왜구]]를 이렇게 공격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후 여러 기록에서도 남아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인]] 데이비드 부쉬넬(1740~1824)이 1인용 소형 [[잠수함]]을 만들어 [[폭탄]]을 바다에 뿌리는 방법을 쓰기도 했지만 큰 활약을 하진 못했다. 이 함의 이름은 '터틀' 호로, 사실상 1인용 [[잠수정]]에 더 가까웠다. [[18세기]]라는 시대상 이 함은 '''수동'''이었고 잠항시간은 30분을 겨우 넘을까말까 했지만 1776년 9월 17일, 이 함은 잠수함 공격의 역사에 첫 시발점을 '''끊을 뻔했다'''... 끊을 '뻔' 인 이유는 몰래 당시 영국 기함인 HMS 이글 호 하부에 접근, 페달로 돌아가는 드릴로 구멍을 뚫고 시한폭탄을 집어넣을 계획이었는데, 이글 호 하부갑판이 '''죄다 구리를 사용한 동판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수중폭파팀 침투를 예측한 것은 아니고, [[따개비]] 같은 생물이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영국 해군]]의 전통적인 '''[[돈지랄]]'''. 따개비가 배 밑창에 달라붙으면 속도가 3~4노트나 늦어지는데 다른 나라라고 함저를 동판으로 도배하면 좋다는 걸 모르지야 않지만 그럴만한 돈과 지원이 없었다. 어쨌건 들고 간 드릴로는 도저히 동판을 못 뚫었으며 들고갔던 폭탄은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버리는 바람에 이글 호는 생채기 하나 안 났다(...). 그 후 여기저기 폭탄을 바다에 뿌려보지만 [[영국 해군]] 승무원 몇 죽인 것 말고는 전과도 없다가 [[영국군]]에 나포되었다. 이후 데이비드 부쉬넬의 편지에 따르면 영국군이 박살내버려 잔해만 겨우 발견했다나... 본격적인 기뢰는 [[19세기]]에 등장했는데 [[크림 전쟁]] 당시 [[독일인]] 공학박사이자 [[발명가]]인 모리츠 폰 야코비(1801~1874)와 임마누엘 노벨(1801~1872/바로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이 개량시킨 기뢰가 [[러시아군]]에서 쓰이면서 [[1855년]]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 후 [[남북전쟁]], 오스만-러시아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전에서 널리 쓰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기뢰의 1차 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기뢰를 엄청나게 사용했다. 특히 [[북해]], [[발트해]]등은 주요 수로와 만 입구가 모조리 기뢰밭으로 포장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기뢰를 설치했다. 그 덕분에 종전 이후에 처리가 매우 곤란할 지경이었다. 이 시기부터 바다에서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접촉기뢰가 대량으로 양산 및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과 [[영국]], [[발트해]] 쪽은 아주 기뢰 바다였다. 일본의 경우 [[미국]]의 항구봉쇄 작전인 '기아(Starvation)' 작전의 일환으로 [[미합중국 육군]] [[육군 항공대|항공대]]의 [[B-29]] [[폭격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기뢰가 투하되어 당시 일본 영해는 거대한 기뢰밭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미 육군 제21공군이 46회 임무 1,529소티로 12,135발의 기뢰를 26개 구역에 살포했다. [[도쿄 대공습]]에 동원된 [[폭격기]]가 '''겨우''' 344기. 기뢰밭을 설치하는 작전기간 중 상실한 B-29는 15기였으나 이 작전으로 인해 일본측에서는 670척 125만톤의 선박이 격침/손상되었고, 애초에 배가 뜰 수가 없으므로 [[고베]] 같은 경우 물동량의 85%가 감소했다. 배가 가라앉으나 못 나오나 바다에 없는 건 마찬가지다. [[영국]] 쪽도 [[U보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대량으로 살포했으나, 정작 영국을 말려죽이려고 기를 쓰던 [[독일]]은 기뢰를 별로 설치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라서 기록상으로는 317개의 기뢰로 8개 [[항구]]를 총 40일 동안 폐쇄했다고 하며 [[타운급 경순양함]] 벨파스트가 기뢰에 접촉해 손상을 입기도 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단 구형 유보트 일부가 기뢰전용이기는 했지만 코앞에 있는 영국 [[항구]]에 기뢰를 깔기보다는 드넓은 [[대서양]]을 헤매며 [[대서양 전투]]에서 죽을 고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토내해]]에 들이부으면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까지 주요 공업지역과 핵심항로가 봉쇄되는 [[일본]]과 달리 다수의 주요 항구가 분산되어 있는 영국은 그만큼 기뢰설치의 효과가 낮았기 때문이다. [[6.25 전쟁]] 당시 [[북한]] 해역도 해군력이라는 게 없어져버린 북한이 열심히 기뢰를 깔아댔고, 결국 [[원산]] 앞바다에는 3천발의 소련제 기뢰가 깔려서 [[미군]]은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동원했지만 결국 너무 시간이 걸려서 지상부대가 먼저 원산에 도착해버렸을 정도다. 원산 상륙작전의 이름은 [[원산급 기뢰부설함]]에 이어져 있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기뢰전 함정들은 다들 한국전쟁에서 소해작전을 시행했던 지역명을 따 명명되고 있다. [[냉전]] 종결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는 [[쿠웨이트]] 연안을 포함한 6개 구역에 수천 개의 접촉발화식 계류기뢰와 자기음향 감응형 기뢰를 설치했고, 접촉한 사례도 몇 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