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산도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시기 행적 ===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전남 고흥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기산도는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 그는 서울 재동에 거주하는 심재설(沈載卨)의 집에서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김철(金澈)과 만났다. 기산도는 김철과 함께 의무금을 모금하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 특별위원에 임명되어 김철로부터 사령장을 받았다. 그는 김철을 자신의 부친 집에 데리고 갔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에서 동지들을 물색했다. 1919년 음력 4월 25일, 기산도는 김철과 함께 영광군 백수면 장신리에 거주하는 김종택(金鍾澤)을 방문하여 국민대회취지서와 선포문 등의 문서를 보여주면서 동참을 권유했다. 김종택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인행(李仁行)을 추천했다. 이후 기산도는 5월 상순경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 거주하는 박균상(朴均庠)의 집에서 1907년 기삼연 의병 부대에서 종군했고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보낸 파리 장서의 서명자이기도 한 [[박은용]]을 만나 독립자금의 모집 활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해 승낙받았으며, 역시 1908년 광양에서 의병에 가담했던 [[황병학]]도 참여시켰다. 이후 기산도와 김철은 김요선(金堯璿)의 집을 방문해 그로부터 180원을 받아냈다. 김철은 이 자금 중 60원을 기산도에게 주고 나머지 돈을 챙겨 상하이로 돌아갔다. 기산도는 전라도 지역 특파위원의 책임을 맡고 김종택, 이인행, 황병학, 박은용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음력 7월 하순경, 조면식, 김창규, 안창선, 이화영, 이선근, 조용준, 김형석, 최재학, 김학수, 황용주, 윤용섭 등을 만나 <국민대회취지서>, <선포문>, <고유문> 등을 보여주면서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해 총 499원을 확보했다. 기산도는 자금을 확보한 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회피하기 위해 8월 초순경 일행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해 10월, 김종택이 부하들과 함께 서울에서 부자 홍종옥(洪鍾郁)의 집에 침입해 370원의 적금 통장을 훔쳤다가 종로 경찰서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군자금 모금 활동 마저 적발되고 말았다. 기산도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상하이로 도피하려 했지만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무위에 그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당오리에서 일본군 밀정에게 습격당해 사장나무에 묶인 채 매질을 당해 실신했다. 밀정은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하려 했지만,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새벽녁에 부엌갈로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하게 했다. 이후 기산도는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지내다가 1920년 4월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고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광주형모소로 옮겨졌다. 형사들은 그의 여덟 손가락에 못질을 하는 등 심한 고문을 가했지만 기산도는 끝내 동지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이빨로 혀를 잘라 벙어리가 되려 했다고 한다. 1920년 5월 5일, 기산도는 김종택, 박은용, 이인행과 함께 광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다. 공판은 2달간 진행되어 7월 19일에 판결이 내려졌고, 기산도는 박은용과 함께 징역 3년형, 이인행은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김종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상하이로 돌아간 김철은 궐석 재판을 통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