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생 (문단 편집) == 구분 == 기강이 무너져 기생의 계층이 생기고 이에 따라 매춘 유무가 달라졌던 조선 후기의 기생은 일패기생(기생), 이패기생(은근짜/慇懃-, 隱君子), 삼패기생(더벅머리/搭仰謀利)로 나뉘는데, 등급에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등이 제한되었으며, 취급 역시 차별이 있었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본인의 실력과 매춘 유무. 기생은 예술과 학문의 수준이 떨어질수록, 기생으로서의 급이 낮을수록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해야만 하는 구조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에 같은 기생, 특히 일패기생이나 정조를 지키는 은근짜들도 곱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이 싸잡아 기생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을 정도라고. 이전에는 국가에서 기생을 양성했기에 수청을 들더라도 기생과 창녀의 구분이 확실했다. 원래 조선은 [[성리학]]으로 인해 매춘이 금지된 국가였고, 관리의 수청을 들었던 관기의 경우조차 제도권 내에서나 허용되었지만 심하면 지탄받았다. 소위 [[창녀]]라 할법한 부류는 천민 여종이나 정조를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매춘 행위가 발각되면 [[노비]]가 되었으며, 양반조차 수청이 아닌 [[강간]]은 금지되었으며, 상중이나 국가 위급 상황에 기생과 어울리거나 그에 너무 빠지면 [[탄핵]]당했다고 한다.[[http://web.archive.org/web/20190815174910/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02&content_id=cp042800020001&search_left_menu=1|출처]] 그러나 기록이 남아있는 명기들의 사례를 보면 마냥 문란하고 사회적 인식이 나쁜 계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랬다면 그 콧대높은 [[양반]]들이 어울렸다는 기록을 남겼겠는가? 애초에 기생이 천한 매춘부로 동일시되기 시작한 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로 조선의 기반이 붕괴되어 가던 시기였다. * 일패(一牌/기생)는 주로 최상류층과의 교분이 깊고 풍부한 교양을 자랑했으며 가장 상급의 춤, 노래 등의 예능을 익혔다. 궁중에서 국가 행사나 연회를 위해 이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가무나 창, 기예, 시, 서, 화, 학문 등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여야만 했다. 매창불매음을 잘 지키며 정조관념이 투철했다고 한다. 궁궐에 출입하던 이들인지라 기생재상(妓生宰相)이라 불리기도 했던 만큼 어지간한 명망과 수준이 안되면 금을 준대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한다. 아예 옥관자를 달았을 정도. 상것들은 이들에게 감히 말조차 걸지 못했다 한다. 표면적인 위치는 천민이나, 워낙에 다재다능한지라 대부분 동네 양반 “따위” 는 손님 취급도 안 해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기생들은 각자의 집이 따로 있었다. 양반의 집에 따로 불려가 기예를 선보이거나 약방기생[* [[의녀]]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약방기생은 원래 천민 출신인 의녀가 기생 노릇을 겸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예술가적 면모)로서는 일패기생이라 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단지 궐에 출입하거나 머물며 기생(은근짜나 더벅머리같이) 노릇을 하기도 하다보니 이렇게 분류된 것.]이나 상방기생으로서 그 소임을 다했다. 궁중을 출입하며 왕이나 그에 못지않은 재상, 혹은 높은 왕족이나 양반들을 상대했다. 이들은 굉장히 지조있는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원래는 관기도 일패기생으로 분류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기강이 무너져 그 관기들이 매춘을 하게 되면서 은근짜나 더벅머리 수준으로 전락했다. 원래 관기는 관리를 상대하며 매춘을 하는게 아니라 궁이나 관가의 잔치에서 기예를 선보이는 이들이었다. * [[의녀|약방기생]]과 [[디자이너#s-2.1.7|상방기생]]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52810&cid=42607&categoryId=42607|대한제국 시절에 존재했다고도 하지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0852&cid=46638&categoryId=46638|연산군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종(조선)|중종]] 때 수차례 이들을 원래 하던 일만 시키려 했으나 한 번 물이 흐려지자 돌이킬 수 없었다고. [[혜민서]]나 [[내의원]] 의녀 출신인 약방기생과 공조나 [[상의원]] 침선비 출신인 상방기생으로 나뉘는데, 내의원 출신 약방기생은 궁초(宮綃)댕기를, 혜민서 출신 약방기생은 통견(通絹)댕기를, 상방기생은 갑사(甲紗)댕기를 드렸다. 원래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기예를 배운 이들이 아닌데다 진짜 기생들처럼 오랫동안 온갖 학문과 재주를 익힌 것도 아니기에 진짜 예술가적 면모로서는 기생이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이 약방기생과 상방기생들이 한성기생조합소, 다동기생조합, 광교기생조합 등을 거치며 일패기생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의사나 간호사로서 환자를 치료하거나 옷 만들고 자수놓던 이들에게 예술가처럼 춤 추고 노래하라고 하면 과연 얼마나 잘 하겠는가. 사실상 그냥 궁궐 연회에 같이 동원되니 싸잡아 일패라 분류된 것이라 보면 된다. * 이패(二牌/은근짜)는 일패와 같이 예능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모자랐다. 애초에 할 수 있는 기예가 일패보다 급이 낮은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뒤에서 몰래 매음하는 경우가 자주 있던 부류였다. 주로 남아있는 기생에 대한 기록 중 고급 기생이라 보일만한 것들은 대부분 이들에 대한 것이다. 은근히 [[매춘]]을 한다고 은근짜(慇懃-/隱君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은근짜라 하여 무조건 몰래 매춘을 했던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신념에 따라 달랐다. 후대에 태어났다면 은근짜였을 [[황진이]]의 예를 보면 더벅머리에 비해 굉장히 취급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인 김건우의 저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9413|<나는 당당하게 살겠다>]]를 보면 자유분방하지만 문란하지는 않은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한다. 일종의 계약 결혼을 한 적도 있었는데, 결혼 기간에는 정조를 지켰다 한다.]. 자기 집이 따로 있기도 했다. 주로 일반 양반과 각 관아의 관리를 상대했다. 기본적으로 이들 역시 예술가였지만, 자신의 의지와 환경에 의해 좌우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고객이 높은 신분인데다 이들 자체의 수준도 높기때문에 무턱대도 천하게 취급하지는 못했다. 돈 많은 양반들이 경관 좋은 교외나 자기 집 후원에 불러서 기예를 즐기거나 지적 교류를 했다. * 삼패(三牌/더벅머리)는 기생 중 가장 하급으로, '더벅머리(搭仰謀利)'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술자리에서 낮은 수준의 잡가나 민요만을 부르며 상위 등급에 비해 대놓고 매춘을 하였다고 한다. [[매춘]] 자체가 업이었으며 기생처럼 가무를 할 수는 없었다. 보통 여겨지는 기생, 즉 창기(娼妓)가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더벅머리도 조선시대 서민이 건드릴 정도는 아니라서 보통 백성도 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삼패라도 만날 수 있었다. 서민을 상대로 매춘하던 여인들은 따로 있었다. 들병이[* 떠돌이 들병장수. 들병에 술을 담아 이고 다니며 팔았는데, 매춘부의 역할도 겸했다.], 각 마을을 오가는 사당패, 절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의 작부[* 소위 갈보(蝎甫)라고 한다.] 등이 있었다.[[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383577200510012195|참조1]][[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52810&cid=42607&categoryId=42607|참조2]] 기생에 대한 기록의 상당수가 이들에 대한 기록이며, 사극 등의 매체에 등장하는 기생 역시 더벅머리에 가깝다. 원래는 이들의 매춘 등에 대한 제재가 확실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기강이 해이해져 문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기방에서 지낸 경우에는 어려서부터 성적 경험이나 수치심을 강제로 많이 당했다는 후기의 기록이 있다. 원래 기방에 출입하는 이들은 고상한 양반이 아니라 거리의 한량이나 왈자패, 하급 관리 같은 다소 신분이 낮은데 돈을 꽤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거친 남자들로 구성된 여러 무리의 손님들이 있는 방에 1명의 기생이 들어갔는데, 어린 기생의 경우 강제로 옷을 벗겨 희롱하거나 추행했다고 한다. 이것은 기생이 기방에 빨리 순응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기생서방[* 주로 군관이나 한량, 무뢰배, 왈자패, 검계 등이 맡았다. 창기의 [[기둥서방]]으로, 손님이 없으면 자신이 그 창기와 잠자리를 하고, 손님이 있으면 그에게 양보했다. 원래 이는 법으로 금지된 것이다.]들이 손님들에게 일부러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시 경우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줄곧 정절을 지키던 기생이 한 [[양반]]에 의해 강제로 겁탈 당하자 매우 수치스러워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관아에 보내져 지방관들을 상대하기도 했으니, 결국 [[케바케]]였던 셈. 애초에 매춘을 하는 기생은 예술인이라기보단 [[천민]]으로 봤다. 천민으로 분류된 이들 중 창기(娼妓)가 있을 정도이니. 사극에서 주로 나오는 기방에서 남자와 희롱하는 그런 부류가 이들이고, 꽤 높은 수준으로 나오는 기생은 대부분 은근짜다.[* 은근짜란 조선 말기에 나누어 부르던 기생의 등급 중의 중간급으로 어느 정도 가무를 하고 은근히 매음을 하였던 경우, 몰래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겉보기에는 어리석은 것 같으나 속은 엉큼한 사람을 이르는 용어이다.] 격이 높은 진짜 기생, 즉 일패기생들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몸 파는 천한 하급 기생이라 해도 일반인이 건들지는 못 했다. 보통 매체 등에서 접해 알고 있는 화려한 기방에 사는 기생들이 바로 이들이다. 아무리 더벅머리라 해도 어느 정도 위신이 있고 돈이 많아야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만일 이들이 기첩으로 들어간다면 그 앞날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보통 기첩이라 천시받는 이들이 보통 더벅머리 출신이다. [[매춘]] 자체가 직업이라 굉장히 천시되었음에도 후에는 정계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신창조합(新彰組合)을 만들어 스스로를 기생이라 했다고 한다. [[http://web.archive.org/web/20190815174910/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02&content_id=cp042800020001&search_left_menu=1|출처]] 이들 사이에서 은근한 신경전도 있었는지 조선 말~[[일제강점기]] 초에 서양에서 [[양산(도구)|양산]][* 우산은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뒤 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다 17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서양에 우산이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산'이라는 양산 같은 것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이 들어오자 패에 관계없이 모두 붉은색 양산만을 사용해 서로의 패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며 일패는 진홍색, 이패는 연홍색, 삼패는 그 외의 색을 쓰기로 정하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길에 양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하나는 진홍색 하나는 연홍색 다른 하나는 다른 색이니 오호라 일패, 이패, 삼패로구나~~ 어린 기생은 동기(童妓), [[서울]] 기생은 경기(京妓), 지방 기생은 지방기 혹은 향기(鄕妓)라 했으며, 기생집의 우두머리 기생은 행수기생이라 했다. 나이에 따라 1살 위면 언니, 2살 위면 형님, 5살 위면 아주머니라 불렀다. 기생끼리도 계급과 나이에 따라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을 '''의기(義妓)'''라 했는데,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기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http://web.archive.org/web/20200101213153/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25&content_id=cp042800250001&search_left_menu=2|의기 현계옥의 사례]] 이외에도 노래를 잘하면 가기(歌妓)나 성기(聲妓), 춤을 잘 추면 무기(舞妓), 가야금을 잘 타면 금기(琴妓), 예술이 뛰어나면 예기(藝妓), 시를 잘 지으면 시기(詩妓), 의로운 행위를 한 기생은 의기(義妓), 절개를 지킨 기생은 절기(節妓), 수청을 드는 기생은 수청기(守廳妓), 방직을 하면 방기(房妓)[* 방직은 심부름꾼을 뜻하지만, 방기는 관리의 수청을 들었다.], 성적 접대를 하면 창기(娼妓)라 하였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7_0030_0010_0010|출처]] 간혹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선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소속에 따라 관기, 민기, 사기, 가기 등으로 나뉘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관아에 소속되는 체제였다. 관기는 관아에 소속되었고, 민기, 사기, 가기는 모두 민간의 기생이었다. 관기는 주로 관아의 관리를 상대했는데,[* 은근짜가 관리를 상대하는 것과 다르다. 관기는 관아에 소속되어 의무적으로 투입되었고, 은근짜는 양반들이 따로 불러서 연회 등에 투입되는 체계였다.] 집안이 몰락하여 관기가 된 경우는 주로 바느질 등의 잡일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사극의 영향으로 기생들이 모여있는 [[공창]]이나 [[집창촌]]이 있었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일본의 [[요시와라]]에 가까운 체계다. 하지만 집창촌에 버금가는곳은 없었으나 기생들이 모여사는 마을은 있었다. 그 예로 북촌한옥마을이 되겠다. 기생들은 관기인 경우는 관아에, 이외에는 자기 집이나 기방에 있었다. 게다가 원래 기강이 무너지기 전의 기생은 매춘이 금지된 이들이었다. 관아[* 원래 관기는 일패기생으로 궁이나 관아의 잔치에 불려가 가무를 선보이는 이들이었으나 점차 기강이 무너져 관리를 상대로 매춘하는 하급 기생으로 전락한다.]나 기방에서 [[매춘]]을 하는 경우는 창기(후기의 삼패기생)라 하여 천하게 취급받았다. 신분도 아예 [[천민]]이었다. 영업 체계도 달라서 자기 집에 머물며 양반들의 후원이나 교외에 불려가 대화를 하거나 기예를 선보인 고급 기생과 달리, 기방이나 관아에서 의무적으로 상대하는 식이었다. 창호지나 비단실을 질에 넣어 [[피임]]했다고 한다. [[페미돔]]같은 것을 원했겠지만 저게 별 효과가 있을 리가(…). 오히려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다른 균에 감염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피임을 하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일반적인 피임법은 [[배란주기관찰법]]과 돼지 창자로 만든 [[콘돔]]같은 물건이었다.[* 이것이 그려져 있는 풍속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