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생 (문단 편집) == [[구한말]] 및 [[근대]]시기의 변화 == [[일제강점기]]인 1916년 3월, 데라우치 총독이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식 유곽([[공창]])제도를 공포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되었다. [[조선]]은 관기 이외에 공창이라 할법한 것이 없었다. 애초에 [[성리학]] 이념이 워낙 강해서 관리를 수청드는 관기조차 수청은 되지만 강간은 안된다거나, 그것도 너무 과하면 안된다는 식의 규율이 적용되었다.[* 수청을 든다고 하면 기생이 벼슬아치에게 성을 바치는 것을 생각하지만, 원래 뜻은 <높은 벼슬아치 밑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앞선다. 이 <시키는 대로 수종하다>가 전의되어 <밤에 잠자리 시중을 들다>가 된 것이고 그에서 유추하여 <성을 바치다>가 된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이 뜻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기생의 밤시중이 나온다. 단어의 형성부터가 벼슬아치가 있는 곳(廳)을 지킨다(守)는 뜻으로, 그렇게 지키고 섰다가 시키는 심부름을 받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 예로 표준국어대사전의 <수청 들다>에도 있는 용례인 "그는 밤새도록 상전에게 수청 드는 일을 했다." 가 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공창제]]가 공포됨에 따라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며 활동하는 허가제로 운영되었는데, 권번은 동기에게 기예를 가르치며 기생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는 중간 역할을 했다. [[마이코]]나 [[게이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제가 일본식 제도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사실상 일본의 오키야(置屋/おきや)와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web.archive.org/web/20190815174910/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28&index_id=cp04280002&content_id=cp042800020001&search_left_menu=1|출처]]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소위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사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국내에서는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았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남자를 간호사로 뽑으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초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남자 [[간호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자를 간호사로 뽑는다는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예외로 [[독일군]]에서 [[간호장교]]를 남성들로만 충당한 예는 있는데 이건 여자에게 군입대를 일절 불허하는 [[독일 제국]] 정부의 방침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에 기적을 두고 3년 동안 기예를 배운 뒤 배반에 합격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소위 말하는 일패기생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기생청은 총독부의 일본 유녀 권번 벤치마킹에 의해 권번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이 권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공식 교육기관 중에선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어서 의의가 꽤 크다. 한 예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국악인들 중 상당수가 권번 출신 기생이었거나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이다.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평양 기생 학교의 경우 강점기 초엔 4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시|진주]] 기생들은 아예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고,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한편 1935년에는 평양 기생 차릉파가 [[서봉총 금관]]을 쓰고 금제유물들을 두루고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어 큰 비판과 논란이 된적이 있다.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녀를 데려와 경성의 신마치(현재의 서울 중구 쌍림동), 혼마치(현재의 서울 명동)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여 기생 제도는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진다. [[부산]]의 경우 미도리마치([[충무동(부산)|완월동]][* 이 완월동의 홍등은 (많이 사라졌지만) '''2020년 현재까지도 완전히 꺼지지는 않고 있다.'''])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녀들이 유곽을 형성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흥가의 첫 시작이 된다.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그때까지 존재했던 기생들은 [[예능인]]으로 전환하거나 대도시의 [[요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물론 기생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생업을 찾아간 여성들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기생 [[이난향]]의 경우는 조선 상위 기생들이 불렀던 [[정가]]와 초기엔 기생 사이에서 금기시되었고, 후기엔 하급 기생들이나 불렀던 잡가를 모두 불렀다. 춤도 전통춤 뿐만 아니라 서양춤도 배웠고, 악기는 국악기인 [[양금]]과 일본 악기인 [[샤미센]]을 연주했다. 기생이 정가와 잡가를 모두 입에 올린 것에서 이전 시대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창기 한국의 연예계는 기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기생들이 연예인이 되거나, 연예인이 기생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가수 왕수복, 이화자[* 이화자의 경우 권번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기생이 아니라 유곽의 작부였다.], [[선우일선]] 등의 여가수가 기생 출신이었고, 석금성, 유신방, 김난주, 김난옥 등의 여배우들이 기생 출신이었으며, 이월화와 복혜숙은 여배우에서 기생이 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197-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연예계를 화류계로 취급하며 깔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그러한 시각은 1990년대 이후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개선 되면서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가 제법 든 노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남아 있는 편이다.[* [[연예인]]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인식이 곯아터진 사건이 바로 '''[[장자연 자살 사건]]이다'''. 옛날 기생들을 [[매춘부]] 취급하는 잘못된 인식이 있었듯이, 연예인을 화류계 작부 취급하던 인식이 [[대한민국]] 전체를 뒤집어놓은 사달을 낸 것이다.] 유명한 [[평양]] 기생은 [[6.25 전쟁]] 때까지도 남아있었다. 당시 [[백선엽]]이 평양을 탈환한 후 평양 기생들이 아직 잘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 봤는데, 그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데, 흥분한 기생들이 자기들이 술을 다 마시고 [[남조선로동당|공산당]] 욕을 막 하더란다. 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기생집 운영을 강제로 시키고는, 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검은 옷만 입게 하질 않나, 음식이고 술이고 비싼 거 잔뜩 먹고는 돈은 한푼도 안 내질 않나, 하고 기생들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공산당 욕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평양 탈환 기념으로 회포를 풀려던 술자리는 기생들의 하소연 자리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cz3zJORvntE, height=280, start=1334)]}}}|| 1970년대 한국 기생의 모습. 영상의 22분 15초 부터 등장한다. 국내기업이 외국 요인을 접대하는 모습인데, 이 때는 이미 '요정'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동영상 속의 인물은 조지 턴불이라는 영국인인데, [[현대자동차]]에서 [[현대 포니|포니]]를 개발하려고 초빙한 경영인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