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선주 (문단 편집) === 사망 === 길선주는 이향리 교회를 세운 후에도 북간도와 함경북도를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35년 8월 평안북도 선천군 월곡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주관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요양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교를 지속했다. 결국 그해 11월 26일,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이끌던 중 마지막 축도를 마친 후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차남 길진경이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길선주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날 오전 9시에 사망했다. 향년 67세. 그의 유해는 평양 상수구리 자택으로 운구되었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다. 장례식은 12월 3일 숭실전문대 강당에서 평양노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장로교 공동묘지인 서장대(西章臺)에 안장되었다. 또한 그는 평소 성경연구에 몰두해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의 저서를 남겼고,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참여해 숭실학교, 숭덕학교 등 설립에 관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길선주가 3.1운동 관련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단순한 참여자일 뿐 독립운동에 열성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포상을 미루다가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목사]][[분류:1868년 출생]][[분류:1935년 사망]][[분류:안주시 출신 인물]][[분류:해평 길씨]][[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