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창덕 (문단 편집) == 약력 == 1930년 1월 10일 [[평안북도]] [[선천군]] 동림면에서 [[개신교]] [[장로]][* 하지만 길창덕 본인은 개신교 [[신앙]]에 대해 얘기한 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종교인인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 개신교를 믿었지만, 이후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냉담자]]가 되었거나...]이자 양말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 길경춘(吉景春)과 어머니 서정희(徐廷熙) 사이 6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https://books.google.co.kr/books?id=NJy4DwAAQBAJ&pg=PT38&lpg=PT38&dq=%EA%B8%B8%EC%B0%BD%EB%8D%95+%EC%84%A0%EC%B2%9C%EA%B5%B0+%EB%8F%99%EB%A6%BC%EB%A9%B4&source=bl&ots=cSkcWUiY4j&sig=ACfU3U1SZPwdbEQRY0VRcxIAE6Rh9S8QfQ&hl=ko&sa=X&ved=2ahUKEwjn59HNmcXnAhU0L6YKHVz8A4IQ6AEwAHoECAoQAQ#v=onepage&q=%EA%B8%B8%EC%B0%BD%EB%8D%95%20%EC%84%A0%EC%B2%9C%EA%B5%B0%20%EB%8F%99%EB%A6%BC%EB%A9%B4&f=false|#]]], [[코주부]]로 유명한 만화가인 [[김용환(만화가)|김용환]]의 그림과 일본 만화 등을 통해 독학했다. [[6.25 전쟁]] 당시 [[월남]]하면서 [[홀어머니]]를 놔두고 와야했던 게 한이었다고... [[1975년]] 그의 [[꿈]]에서 어머니가 나타나 멀리 작별한 다음, 산으로 올라가는 걸 보았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며 종일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1955년]]에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에 [[허 서방]]을 연재하며 만화가로 데뷔하여[* 위키백과에서는 1955년 서울신문에 《머지않은 장래의 남녀상》으로 데뷔했다고 나온다.] [[1970년]]부터 [[만화왕국]]에 2년간, [[소년중앙]]에 4년간 '''[[꺼벙이(만화)|꺼벙이]]'''를 연재하고 [[1971년]]부터 [[여성중앙]]에 '''[[순악질 여사]]'''를 18년동안 연재하면서 [[명랑만화]]로 인기를 얻었다. [[정의의 재동이]], 꺼벙이, 순악질여사 등을 통해 4,800회로 국내 최장 연재기록을 세웠다. 순악질 여사는 후일 스핀 오프인 [[순악질 남편]]으로 재연재되기도 했으며 영화 및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1983년부터 KBS2 <사랑방중계> 삽화에도 [[https://youtu.be/OthxYn9jt6w|참여]]했다. 그의 작품 중 '순악질 여사'는 개그우먼 [[김미화]]가 [[쓰리랑 부부]]라는 개그코너를 할 때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미화는 이 역할로 스타 개그우먼이 되자, 길창덕에게 직접 찾아가 감사인사를 했고, 그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순악질 여사'그림을 손수 직접 그려주고, 싸인까지 해줬다고 한다. 김미화 역시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도 이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매체에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을 연재했고, [[명랑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만화가로 평가 받았다. [[현대모비스|현대정공]] 사보에서 미스터 현정을 연재한 것을 마지막으로 [[1998년]]부터 [[폐암]]으로 인해 작품 활동을 중지했다. [[2009년]]에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고, [[한국만화가협회]] 고문으로 재직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