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창덕 (문단 편집) == 별세 == 엄청난 [[골초]]였고, 그로 인해 폐암을 앓았으나 거의 나았고 노환으로 사망했다. 같은 실향민이라 친하게 지내던 후배인 [[윤승운]]이 회고하길... >하루에 2, 3갑은 기본이고 심지어 하루에 5갑까지 피운 걸 봤다. 어이구, 선배님 피워도 너무 많이 피우시네. 너무 많이 한 번에 피우면 나쁘다고요! 라는 내 말에 그냥 웃으셨다... 그런데 [[술]]은 매우 꺼렸다고 한다. 만화가 모임에서도 한잔 마시고 그만두는 게 허다했다고... 2010년 1월 30일 오후 12시 10분 ~ 오후 1시 사이, [[폐암]]으로 12년간 투병 끝에 만 80세를 일기로 작고. 유족으론 부인과 4녀, 사위 최준호 공연예술감독이 있다. [[경기도]] [[평촌]] 한림대 성심병원 특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고, 2010년 [[2월 1일]] 오전 9시에 발인.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6.25 전쟁에 참여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기 때문에 현충원 안장 자격을 갖춰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이유로 그의 묘비에 육군 하사 길창덕으로 세겨져 있다.] 인터넷 상에서는 추모 이미지로 아래의 [[꺼벙이(만화)|꺼벙이]] 마지막화 장면이 업로드 되기도 했다. [[파일:/pds/201002/02/18/d0050518_4b66efad50dfd.jpg]] 해당 장면은 꺼벙이의 아빠가 중동 지사로 발령나서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 [[사우디아라비아]]로 가는 꺼벙이 [[남매]]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만화가로 알려졌지만 '''[[군인]]'''이기도 했고,더불어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다. 그래서인지 무덤에는 만화가 길창덕이 아닌 '''하사 길창덕'''이라는 이름으로 묘비가 세워졌는데 생전에 문화훈장까지 수훈했으나 국립묘지의 안장 원칙에 문화훈장 수훈자 자격은 포함되어있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참전군인 신분으로 안장될 수 밖에 없었다. --본인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만화에서도 [[반공]]적 요소가 강했는데([[판문점]]에서 멀리 보이는 [[조선인민군|북한 군인]]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어린 주인공들 대사를 봐도....),아무래도 6.25를 겪고 [[실향민/대한민국|고향에서 강제로 나와야했으며]] 전쟁에도 참전했던 분이니 더 그런 성향이 깊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 보자면 반공적 요소를 강조하고 군사정권을 매우 긍정하는 어용만화가라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반공을 강조하고, 당시의 시대상을 만화에 반영했을 뿐인 것을, 매사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는 편파적인 견해를 가진 일부의 시선일 뿐이다. 이런 논란에 기여한 것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만화관련 책자를 여럿 내던 박 모씨([[청강문화산업대학교]] 논란에 나오는 그 사람이다)로, 이런 논조로 과거 반공만화에서 마치 길창덕이 중심인 양 여럿 쓰던 바 있어서 이것만 보고 이렇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길창덕은 닥치고 정부에 아부하는 게 아니었다. [[중앙일보]] 편집위원으로 신문만화를 연재하던 시절, 정부를 비판한 작품으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다가 사흘만에 풀려난 일도 있었다. 이북 출신 만화가인 [[신동우(만화가)|신동우]]와 확실히 달랐다. 신동우는 반공 뿐 아니라 유신 시대부터 여러 내용으로 적극적으로 정부 시책에 찬동하는 작품을 그린, 전무후무한 어용 만화가였기에 항목에서 나오듯이 죽은 뒤에 이런 점 때문에 더 묻혀졌다. 정확히는 전투를 한 게 아니라 홍보 만화, 도면을 그리는 형식으로 참전했었다. 대담집에도 나온다. 사실 비단 길창덕 뿐만 아니라 전쟁때 참전한 만화가들 대다수가 소위 [[삐라]] 그리는 작업에 동원됐다. 대표적으로 [[고바우 영감]]의 작가 [[김성환(만화가)|김성환]]이 있다. 참고로 60~80년대 만화에 대한 국내의 시선은 아주 나뻤다. [[정병섭군 자살사건]]을 계기로 만화에 대해 거의 탄압하는 분위기가 이뤄졌으며 국민들도 이에 수긍해 만화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지는 경우가 늘어났었다. 더구나 작가들의 활동에 대한 검열이 심해지면서 2020년대 시점에선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검열 내용도 존재했었는데 [[만화 검열제|이 문서]]를 참고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런 와중에 만화가들이 살아남으려면 당시 정부에 밉보이는 걸 피했어야 하는 입장이라 당시 반공 분위기에 편승한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의 다수는 [[6.25 전쟁]]의 직간접적인 피해자 입장이었던 점도 생각해야 할 부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