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가진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noQyaEIwoo)]}}} || || {{{#ffde09 '''동농 김가진과 대동단의 잊혀진 전쟁, 두 번째 독립 운동'''}}} || 1910년, [[경술국치]] 시기에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10월 [[의친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몰래 망명시키려 준비했다가 중간에 발각되었고, 아예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때 나이가 이미 '''74세'''였는데, 신념을 떠나 육체적으로 이미 허약해지기 쉬운 시기임에도 거친 풍찬노숙의 길을 택한 것. 이후 임정과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조선 국왕과 대한 황제에게 충직했던 유신(遺臣)이었음에도 왕조 복벽(復辟)을 주장하지 않고 '''민국(民國)의 일원'''임을 자처했으며, 평생을 외교관으로서 살아 왔음에도 외교론보다는 '''무장 투쟁'''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의 유연성과 과감함이 빛난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260|#]] 1920년 3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1881)|박용만]]·[[나창헌]]·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국의 조선귀족 중엔 정말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는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이 아니어서 사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