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가진 (문단 편집) == 독립문관련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VdfgkKxFMU)]}}} || || {{{#ffde09 '''동농 김가진 현판문을 적다'''}}} ||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독립문 편액 글씨는 이완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손자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96758.html|두]] [[http://news.joins.com/article/4466187|건의]] 주장을 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돈의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 · [[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창덕궁#s-4.4|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년 ~ 1922년)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년 ~ 1991년)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 >-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중앙SUNDAY 기사에서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씨가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교태전#s-4.4|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로써 그는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전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s-4.4|창덕궁 후원]]의 [[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창덕궁 부용정|부용정]], [[창덕궁 애련정|애련정]], [[창덕궁 희우정|희우정]], 금마문, [[창덕궁 폄우사|폄우사]], [[창덕궁 의두합#s-5|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그가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또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34&cid=51385&categoryId=51385|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 조선귀족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 >-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그러나 [[독립문|제국독립문]](帝國獨立門)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그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