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경기 (문단 편집) === [[태평양 돌핀스]] 시절 === [[파일:attachment/P1010009.jpg]] || [[파일:/image/318/2009/05/18/ja_03.jpg]] || || 아버지 [[김진영(야구)|김진영]](오른쪽)과 함께 ||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1차지명 신인으로 당시 신인타자 계약총액 최대 (8천만원)을 기록하며 입단, [[1루수]]와 중심타자(주로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 당시 태평양에 거포는 포수 김동기 뿐. 입단 첫해부터 4번타자 거포로 활약했다는 것은 태평양 돌핀스에서 김경기에 대한 기대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등번호는 원래 37번이었으나[* 참고로 1년 먼저 태평양에 입단한 ~~회전식 오각별 스트라이크 존, 혼이 실린 스트라이크 등으로 유명한~~ 사촌형 김풍기의 등번호가 38번이었다. 이와 연관이 있을 듯.][* 김경기 이후 [[이재주]]가 등번호를 물려받는다.], 1993년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00'''번 등번호를 달면서 이때부터 '''등번호 00번은 곧 그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홈구장이던 숭의동 야구장에서 특히나 강한 모습과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 홈팬들로부터 열화를 받아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매년 0.270~0.290타율 사이에 20홈런 칠수있는 능력을 가진 그는 당시 타선이 약한 [[태평양 돌핀스]]의 중심타선의 핵심이었다. 특히 1994년에는 [[윤덕규]]-김경기-[[김동기(야구)|김동기]]로 이어지는 [[Y2K]] [[클린업 트리오]] 주축역할로 활약했는데, 여기서 4,5번 타순인 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KK포'''는 실로 위력적이었다.[* 특히 태평양 돌핀스는 타선이 매우 물방망이였기 때문에 김경기의 활약은 매우 컸다. 그만큼 견제도 많이 받았고 스탯도 손해보았다. 쌍방울 약체 시절 김기태나 꼴찌하던 한화의 김태균처럼.] 그 해 김경기는 23홈런을 기록하여 활약한다. 더불어 태평양 투수진의 분전까지 더해져 태평양은 정규리그를 2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상대로 스윕하면서 팀 최초 한국시리즈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시리즈에서 신바람 모드 절정이었던 엘지 트윈스에 의해 일방적인 스윕으로 아쉽게 준우승 고배를 마셨지만 타선의 기둥 김경기의 활약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1994년 23개의 홈런으로 25개의 홈런을 친 쌍방울의 [[김기태]]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 당시 김경기는 컨디션이 좋아서 몰아치려고 바짝 벼루었으나, 정규리그 마지막 시리즈 상대였던 쌍방울의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안던지는 등 견제를 당해 홈런을 추가하지 못하였고[* 이때 쌍방울 감독은 유명하신 그분], 이때 홈런왕에 실패하면서 선수생활 무관에 그치게 된다.[* 2018년 10월 13일 광주챔피언스필드 롯데-기아 경기 중계중 언급. 경기 중후반에 캐스터가 롯데 투수 [[오현택]]의 홀드왕 관련해서 말을 하다가 김경기 해설위원에게 선수시절 유명했는데 개인타이틀 획득한 적 있는지 물어보자 김경기 본인이 한 말.]~~그나마 1996년 골든글러브는 타서 100프로 무관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이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연속홈런을 치면서 울분[* 본인이 직접 언급.]을 풀었다고 한다.[* 1차전 2회 선제솔로포, 2차전 7회 8대0으로 달아나는 추가솔로포, 3차전 연장10회초 2:1로 결승포. ~~영양가 보소 ㄷㄷ, 그 와중에 앞에서 설명한 태평양 공격력 그대로 죄다 솔로포. 태평양에서 홈런이 5방 나왔는데 전부 솔로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