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계원 (문단 편집) == 생애 == 1923년 [[경상북도]] [[영주시|영주군]] [[풍기읍|풍기면]] 동부2동에서 [[개신교]] 집안의 4남 1녀 중 장남이자 집안의 [[장손|종손]]으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1942년 [[서울특별시|경성부]] [[연세대학교 상과대학|연희전문학교 상학과]]에 입학했다가 [[일본 제국|일제]]가 학병제를 실시하면서 강제 징집되어 [[일본 육군]]에서 견습 사관으로 복무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일본군 [[소위]]로 임관과 함께[* 일본 군부는 패전 직후 군인들이 [[후생성]]의 군인연금 및 공제비를 더 받을 수 있도록 패전 당시 진급을 앞두고 있었던 장병들을 대상으로 임관과 진급을 대대적으로 시켜줬는데 이를 포츠담 진급이라고 한다. 김계원의 경우에는 복무 기간이 짧을뿐더러 [[조선인]]은 패전 이후에는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후생성의 군인연금 대상자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소집 해제가 되어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국군준비대]]의 [[이혁기]]와는 교회 친구였다. 당시 [[서북청년회]]와 국군준비대의 갈등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혁기는 그가 개신교인이라 [[공산당]] 계열이 많이 포진한 국군준비대보다는 [[미군정]]이 장교단 인원을 만드는 쪽에 가담하기를 추천했다.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이응준]]이 주로 이끌었고 김계원은 이응준의 아들과 아는 사이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대한민국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60년 [[육군대학]] 총장이 되었고, 이 때 부총장이 바로 [[김재규]]였다. 이 둘은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김재규를 김계원이 구해주면서 친해졌다 한다. 이후 제3군관구사령관으로 보직을 옮겨 근무할 때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김계원은 5.16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충청남북도지구 계엄사무소장으로 발령 받기도 했다. 이후 제5군단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쳤고, 1966년에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69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대장(계급)|대장]] 예편 이후 '남산 멧돼지' [[김형욱]]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임명 당시의 에피소드가 흥미로운데 김계원은 대장 전역 후 부인 서봉선과 함께 고향 쪽으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영주역에서 기차가 멈춰서더니 수십 분간 움직이지 않았고 영주역장이 객석을 일일이 누비며 '김계원 장군님'을 찾아다녔다고 하는데 [[청와대]]에서 급히 호출했다는 것. 결국 김계원은 기차에서 내려 인근 군부대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로 직행하여 중앙정보부장 임명 언질을 받았다.[* 출처: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유능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신임이 대단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 김계원은 전임인 김형욱과는 달리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신사같은 인물이라 김계원 본인은 이 영전을 곤혹스러워했고 내가 어떻게 그런 중책을 할 수 있겠냐고 강력하게 고사했지만 박정희는 '김형욱이처럼 사람 막 안 패도 돼. 임자가 맡아!'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다.[* 사실 김형욱이 중정부장으로서 공포스러운 존재이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중정 내의 여러 가혹행위 등이 외신에 알려지는 바람에 정권에 상당히 부담이 갔다고 한다. 김형욱을 물러나게 한 것은 결국 3선 개헌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한 박정희의 입장에선 공포정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김형욱과 비교하면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한 양심을 지키고 불필요한 폭력도 최대한 자제한 편으로 당시 [[야당]] 사람들은 칭찬 반 놀림 반으로 그를 '남산골 샌님'으로 부르기도 할 정도였다.[*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에서도 이런 면모는 두드러지는데 호통과 협박으로 일관했던 전임 중앙정보부 인사들과는 달리 김계원은 강원용 목사에 대해 수집한 자료를 늘어놓으면서 진심으로 한숨을 쉬며 '목사님이 자꾸 이러시면 우리도 어찌하는 수가 없지 않냐'고 인간적으로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래서였는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대비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되는데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는 재임 기간이 짧은 편이다.[* [[중앙정보부]]부터 [[국가정보원]]까지 역대 수장 중 김계원은 [[12.12 군사반란]] 세력을 빼면 단기 재임 3위에 해당하는데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보다 짧을 정도.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에 요원들이 샌님처럼 행동해서 힘이 없어 보였다는 박정희의 압박이 있었단다.] 후임 중앙정보부장에는 [[주일대사|주 일본 대사]]였던 [[이후락]]이 취임하였다. 1971년 1월 주 [[대만]] 대사에 임명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주일대사로 가게 된 [[김정렴]]의 후임으로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는데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천거에 의한 것이다. 이 때도 김계원은 일차 비서실장 임명을 거부했으나 노년의 정권 말기 박정희는 "실장일은 안 해도 되니 와서 말벗이나 하라"면서 결국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3인방은 군 시절부터 매우 친했다고 하는데 박정희와 김재규는 동향과 같은 [[교사]] 경력이 있었고 박정희와 김계원은 누가 더 키가 크냐며 아웅다웅하며 장난칠 정도였다고 하며 김계원은 김재규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뻔한 것을 구해줬다고 한다.] 김정렴이 영전한 이후 외롭던 박정희가 정말 친밀한 인물을 비서실장으로 들인 것.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박정희는 [[차지철]]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사이였다고 한다.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신분으로 [[궁정동]] 만찬에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과 함께 참석했다.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차지철을 죽일 거란 말을 들었으나[* "형님, 그 놈을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말해서 차지철만을 얘기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차지철을 해치워 버리겠다"[* 김계원은 이 말을 "경호실장 자리에서 잘리게 만들고 다시는 재기 못하게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김재규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음을 감안하면 차지철을 좌천시킬 만한 건수 하나 잡는 건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고, 혹시나 차지철이 방해를 할 것을 우려해 자신에게 대강의 계획을 미리 얘기했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는다. 김계원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으니 대통령을 만나는 걸 차지철이 막을 명분이 없기 때문.]는 말이 국가 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말 그대로 암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견해는 다름아닌 10.26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http://www.law.go.kr/%ED%8C%90%EB%A1%80/(80%EB%8F%84306)|(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 등이 제기한 소수 의견에 나타나 있다. 양병호 당시 대법관의 소수 의견을 그대로 인용한다. "(김재규의) 해치워 버린다"는 말이 깡패 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 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김계원)이 위 T(차지철)를 암살하겠다는 것인 점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 만찬장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총을 쏘고 김재규의 부하(궁정동 안가 직원)들이 청와대 [[경호원]]들을 거의 다 죽여버릴 동안 이를 막지 못했다. 물론 김계원 비서실장은 당시 술에 취해 있던 상황이었고 수중에 무기도 없었으므로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나자마자 박정희의 시신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는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으며 최규하와 함께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가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직후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으며 김재규는 아마도 김계원을 믿었던 것 같은데 공포심에 의한 것이었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계원은 김재규의 뒷통수를 친 셈이었다.[* 보통 무기력한 방관자 정도의 이미지지만 사건 전에 김재규가 차지철을 해치우겠다는 말을 할 때 별 말 없이 그대로 듣고만 있다거나 하는 등, 전후 여러 미심쩍은 움직임이 있어 암묵적인 방조자 내지 [[기회주의]]적 배신자로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만찬 전에 김재규로부터 박정희 암살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박정희 암살을 방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1980년 [[재판(법률)|재판]]에서 김재규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1988년 특별 사면으로 복권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체포 된 이후 합수부에게 압류당한 [[경기도]] [[과천시]]의 땅 13,000평과 [[서울특별시]] [[서초구]] 소재의 양재동 땅 4,000평 및 기타 재산등 1990년 재판 당시 시가 약 100억원 상당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청구했으나 1991년 시효 만료 및 증거 불충분 등으로 패소하였다.[[https://imnews.imbc.com/replay/1990/nwdesk/article/1830592_30435.html|뉴스]] 2016년 12월 3일 향년 93세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한국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 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유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생전에 [[최순실]] 게이트 소식을 듣고 [[박근혜]]를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김계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박근혜와 최씨 일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