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식 (문단 편집) === 항일 독립 운동 === || [[파일:Korean Commission Members.jpg]] || || [[구미위원부]] 활동 중인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 ||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학교 설립과 독립군단 창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1916년 앤더슨&마이어 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장자커우시|장자커우]] 지사 등에서 근무했다. 1918년 [[상하이]]로 건너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였고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무성 측으로부터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그는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만세 운동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고 3.1 운동을 기회로 각지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된다. 1919년 4월 그는 파리 현지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9월에 가서야 각지의 임시 정부가 통합된다.] >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 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 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고로 금일 우리 민족은 그 멸취(滅取)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오. >---- >- 1921년 1월 상해 환영회 석상에서의 연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1920년대 초 [[고려공산당]] 후보 당원으로 가입하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동방 노력자 대회([[극동]] 피압박자 민족 대회)에 한국 대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연설에서 김규식은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을 [[흡혈귀]] 국가라고 성토했다. 이러한 행보는 그가 공산당원으로서의 깊은 자각으로 인한 행보라기보다는 '민족 자결주의' 등 국제 조류가 한국의 상황과는 맞지 않자 또다른 축이 될 [[소련]]에 [[외교]]적 행보를 한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로 이 시기는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에 기대를 가졌던 인물들도 많았다.] >[[한국인|한민족]]은 홀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다. 이웃 어느 나라도 [[한민족]]의 독립 투쟁을 돕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결국 [[중화민국|아시아 이웃 나라]]들을 상대로 [[중일전쟁|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때는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대한민국|한국]]이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워야 한다.''' >---- >- 1922년 7월 모스크바의 『공산평론』 中 이후 1924년~1926년 초까지는 독립운동 일선에서 잠시 떠났다가[* 1924년 3월 1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내란죄]]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22&evntId=0034981953&evntdowngbn=Y&indpnId=000001360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 기각 판결]]을 받은 기록이 있다.][* 1924년 9월 재중국 소련 무역 대표부 석유 과장의 이름으로 된 한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김규식은 과거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고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도 참가했었음. 현재에 그는 신념을 바꾼 변절자이며 [[사업]]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는 그의 시도도 실패하고 있는 인물임. 미국 [[석유]]의 판매를 비롯한 몇 차례의 [[회사]] 설립을 위한 그의 시도는 알려져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소련을 떠난 뒤 이미 김규식은 공산당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이런 그에 대해 소련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 2월 [[난징시|난징]]에서 유자명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해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에게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고 1927년 [[톈진시|톈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 생활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조차 일본 [[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 차녀 김민애, 1930년 장녀 김한애를 병으로 잃었다. 1930년 8월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학무장에 선임되고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됐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난징시|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 특별반의 군사 교관이 되었으며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 강사가 되었다. 1933년 4월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 명이 모인 구류노류대학교에서 열린 한국 독립에 관한 연설에 강사로 참석했으며 7월 '중한 민중 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다시 출국해 미국을 방문했다. 귀국 후 김규식은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동맹의 비밀 요원인 [[이용직]]과 한길수를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동맹과 정보 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선임한 두 대표자 중 한길수는 미국 내의 이승만 세력과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고 심지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였는데("방선주 저작집" 1권)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1가지 원인을 제공했다. 당연히 이승만은 김규식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과격파나 공산주의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길수는 김원봉이 이끌던 공산주의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발간하던 [[신문]]인 '독립'지에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송병조]], [[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 대동맹, 대일 전선 통일 연맹, 한국 광복 동지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 독립을 위해 민족 [[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1935년 10월 12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독립운동가)|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 등과 함께 민족 유일당 창당 회담을 가졌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민족혁명당 [[주석(직위)|주석]] 직에 올랐다. 1940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구]] 등을 만나 회담을 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 연합 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민족혁명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각을 결정한다. 1944년 4월 24일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임정 내 제1당인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주석으로 선출된 데 대하여 제2당인 민혁당의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안배되었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해나갔는데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오철성]] 등, 임시정부의 [[엄항섭]]과 안원생 등을 설득해 재중 동포 중 기독교인의 우호 단체인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 [[조소앙]], 정환범, 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