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규환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자신이 정밀가공을 하면서 [[품질관리(직무)|품질관리]] 전문가가 된 것은 물론, 부인도 마산의 한 공장에서 품질관리직 출신을 품질관리에 대해 같이 공부한다는 구실로 만나서 결혼하였다. 김규환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명장이 된 것에는 부인의 공로가 결정적이라고 평가하였다. 부인 역시 생산직 출신이라 회사에서 몹시 복잡한 정밀가공 품질관리 문제가 생기면 아내가 아이디어를 내놓아 문제를 해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부인은 이런 직접적인 기술로만 김규환을 도와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규환은 회사에서 연구개발을 하겠다고 들다가 메인 스핀들이라는 매우 비싼 부품을 불량낸 적이 있었다. 들키면 집을 팔아서 변상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김규환은 2년 반 가까이 노가다성 연구를 시행해서 공으로 과를 덮겠다는 방안을 택했다. 그러자 부인은 연구를 해내서 과실을 덮는다는 발상을 지지해주고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원망하거나 이혼하자고 요구하지 않았다.[* 신혼 초였고 이미 학력이 부족했던 남편이 경제적 무능까지 드러냈던 사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부인의 인내심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집에 오는 날에는 힘든 기술개발 과정에 몸 상하지 말라고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또 부인은 [[생활비 절약 노하우]]의 달인이었다. 젊을 시절부터 사고 싶은 물건을 많이 사면 경제력이 남아나지 않을까봐 일부러 상점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80년대 기능공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외벌이로 경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규환이 초등학교 중퇴였던 데 비해 부인은 4살 연하의 [[고졸]]이었다. 다른 [[맞선]]에서 김규환은 학력이 없다며 멸시받고 쫓겨나기 일쑤였는데 유독 현재의 부인만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면 나중에 다니면 된다'면서 단점을 덮어주었다. 위와 같은 태도 때문에 이들 부부는 [[결혼/갈등|결혼생활 중의 갈등]]이 거의 없었다. 이들의 이런 생활방식은 교육에도 적용되었다. 자녀들과도 집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아 비누 낭비 등 집 안에서 개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아들 이름은 '김 품질', 딸 이름은 '김 관리'라고 지었다. [* 중학생 때쯤 학교에서 놀림을 받자 개명하였다.] 2017년 기준 아들은 심장내과 [[전문의]] 겸 박사, 딸은 지방국립대 피아노 조교수를 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