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녕사굴 (문단 편집) == 전설 == ||[youtube(yb7aDq-joXE)]|| 사굴(蛇窟)이라는 명칭은 뱀굴이라는 의미로 다음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제주 구좌읍 김녕리 마을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여기에서 큰 [[뱀]]이 살았다고 하여 '뱀굴[蛇窟]'이라고 한다. 이 뱀에게 매년 처녀 한 사람을 제물로 올려 큰굿을 했다. 만일 굿을 하지 않으면 뱀이 곡식밭을 다 휘저어 버려 대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양반집에서는 딸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의 딸이 희생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평민의 딸은 시집을 갈 수가 없었다. 그즈음, 조선 중종 때 서련이라는 판관이 제주에 부임해 왔다. 서 판관은 뱀굴의 소문을 듣고 괴이한 일이라며 분개하였다. 곧 술, 떡, 처녀를 올려 굿을 하라 하고, 몸소 군졸을 거느리고 뱀굴에 이르렀다. > >굿이 시작되어 한참이 지나자 과연 어마어마한 크기의 뱀이 나와 술과 떡을 먹고 처녀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이때 서 판관은 군졸과 함께 달려들어 창검으로 뱀을 찔러 죽였다. 이것을 본 심방(무당)이 “빨리 말을 달려 성(현재의 제주 읍성) 안으로 가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서 판관은 말에 채찍을 놓아 무사히 성의 동문 밖까지 이르렀다. 이때 군졸 한 사람이 “뒤쪽으로 피비[血雨]가 옵니다.”라고 외쳤다. “무슨 비가, 피비가 오는 법이 있느냐?”라고 하며 서 판관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마자 서 판관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죽은 뱀의 피가 하늘에 올라가 비가 되어 서 판관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640&cid=50223&categoryId=51051|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녕사굴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 서판관의 모델이 된 서린은 당시 19살에 무과 급제한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뱀신앙을 타파하는데 주력했지만 낯선 제주도 풍토에 적응을 못했는지 부임 2달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서판관의 죽음은 제주 토속신앙에 전환점이 되는데 서판관의 바람과 달리 제주도민의 뱀 신앙이 더 투철해졌고 뱀신(또는 뱀신앙을 등에 업은 토호들)을 건드리면 서판관처럼 신벌받아 죽는다는 강한 금기가 생겨 이형상이 부임하기 전까지 일종의 불가촉 영역으로 오랫 동안 남게 된다.] 해당 링크 글에 나오는 인물 중 이삼만이란 이는 실존했던 인물이다. 설화 속 이삼만의 만은 일만 만(萬)이지만 실존인물 이삼만은 늦을 만(晩) 자를 쓴다. 실존인물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은 설화와 달리 관직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고,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게 사사한 명필로 유명하다. 호는 창암(蒼巖)으로 전주 지방의 명사였다. 본디 정읍 사람으로 집안이 본래 부유했으나 이삼만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느라 가산을 다 탕진해 가난히 살았다. 이삼만을 두고 한 가지 야사가 내려온다. 이삼만의 부친은 이삼만이 어릴 적에 뱀에 물려죽었고 이로 말미암아 집안이 기울어졌다는 것. 그래서 이삼만은 뱀을 원수로 여겨 길가다가도 뱀만 보면 돌이나 지팡이로 찍어 죽이고 잡아먹었다. 하도 이삼만의 살기가 등등해 뱀들도 이삼만이 오면 숨기 바빴다고 한다. 이런 내력이 있어 이삼만은 죽어서도 나름대로 신격화되었다. 이삼만의 고향 정읍 지방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나 상사일(上巳日)인 첫 뱀날에 '배암뱅이' 풍속이라 하여(뱀막이) 이삼만이 쓴 글, 또는 이삼만 이름 석자를 거꾸로 붙이고[* 뱀에게는 모든 물체가 거꾸로 보인다는 당시 속설에 따른 행위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이삼만의 이름을 외치면 뱀이 안 꼬인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튼 뱀의 저주를 받고 풀썩 쓰러져 죽는 설화 내용은 알아주는 뱀사냥꾼이었던 실제 이삼만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사실 이런 설화들은 서울에서 온 유학으로 무장한 혁신적인 수령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방 토호들간의 대립을 나타내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제주도는 예전부터 내지와 다른 문화 생활을 영위했는데 당시 제주도는 오지 중 오지였고 대부분 수령들이 가기 싫어하거나 어떻게든 임기만 마치면 된다라는 식으로 대충대충 업무를 보다가 육지로 올라가는게 관례였다. 물론 기건, 이약동, 이경록, 이원진 등 제주도민에게 선정을 베푼 청백리 수령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그저 공무원으로 소임을 다했을 뿐 딱히 유학자의 특색을 비춘 사람들은 아니였으며 어느 정도 제주도민의 생활과 타협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제주도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사실상 육지와는 다른 독립된 문화권으로 남았다. 일부다처는 기본에 신앙의 대상으로 뱀을 모시질 않나, 허구헌 날 굿판에 참여해 농사는 손에 놓고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질 않나 동성동본끼리 결혼하질 않나, 벌거벗고 물질을 하는 등등. 그래서 한양에서 부임한 수령들 중에 음란하고 천박한 풍속이라며 예전부터 전해오는 악습들을 없애는데 주력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령 [[맹꽁이 서당]]에서 나오는, 선정으로 유명한 유학자 이형상도 제주도에 부임하자마자 한 일이 음사(淫祀) 철폐, 무속행위 금지 등 각종 미신타파였다. 사찰 2개, 신당 129개를 태워버렸고 제주에서 한라산신을 모시는 대표적인 신당인 광양당과 광정당을 없애버렸으며 굿을 주관한 무당(심방)들도 굿 대신 농사를 짓게 하였다. 향교를 복구했다. 이때 일이 꽤 인상깊었는지 제주도에 이형상에 관한 설화가 다수 있는데 김녕사굴 전설처럼 이형상이 큰 구렁이를 퇴치하는 설화도 있다. 다만 끝내 죽고 마는(보복당하는) 서판관과 달리 이형상은 각종 토착신들의 견제와 방해를 뚫고 화살 한방으로 구렁이를 퇴치해 성공하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제주도 토착 귀신(토호들)들이 보복하려다가 이형상이 전에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고려시대 무장의 혼(조력자)의 도움으로 제주도를 가까스로 탈출하는 설화가 있다. 실제로 이형상이 제주목사 시절 김대길이라는 이가 대를 이어 감목관으로 일하며 제주도민을 괴롭히자 과감히 세습제를 혁파하기도 했는데 이형상의 과감한 개혁이 하나의 전설로 남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반이었지만 이형상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이듬해 6월에 제주를 떠나게 된다. 그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게 된 이유는 유배인들을 두둔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때 이형상이 얼마나 철저하게 제주 토속신앙과 무속을 파괴했는지 제주 사람들 전설에도 이형상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며 이형상이 제주를 떠난 이후에도 토착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지만, 제주 사람들은 이형상에 의해 수백, 어쩌면 수천년을 내려온 신당의 문화가 변질되었다고 믿고 있다. 특히 한국신화나 전통 무속을 연구하는 민속학자들 중에 이형상 때문에(?) 제주도 고유 전통 무속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하거나 한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괴력난신을 배제하고 지방 곳곳에도 유학 장려와 성리학 보급에 힘썼던 조선에서는 당연한 일이였다. 비슷한 이유로 서낭당이나 부군당도 이렇게 갈려나갔다. 이렇듯이 [[서문표]] 설화처럼 지방 토호나 유지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일부러 미신이나 악습을 조장해 힘없는 민초들을 핍박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다 못한 유학자 출신 수령들이 본보기 삼아 그들이 표면적인 구실로 삼은 여러 미신들을 앞서서 타파했다. 위 설화 속의 큰뱀도 지방에 오래 뿌리잡아 세력화된 악질 토호들의 은유일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