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동인 (문단 편집) === 소설가 활동 ===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있어 소설가 김동인의 미덕은,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점이다. 2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근대 문인 중에서도 윗세대로 꼽히는 인물인 그의 작품들은, 2010년대에 현대 한국어 표기법으로 바꾸지 않고 그냥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1930년]]에 [[광염소나타]] 발표. 또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돕는 젊은이들을 다룬 [[가상역사물]]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그는 스스로 역사물을 고증성에 따라 역사소설, 역사담, 야담 등으로 분류했고, <운현궁의 봄>은 역사소설, <젊은 그들>은 역사담으로 구분된다. 80년대에 KBS-2에서 드라마로도 만든 바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순수창작물이 아니다. 일본 닌자소설을 번역한 다음 배경 바꾸고 살을 덧붙인 작품이라서, 기승전결이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 어떻게보면 습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여기서 키운 실력으로 최고작 <운현궁의 봄>을 집필한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1938년]] 쯤에는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견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재출간도 이루어지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위키문헌에 가면 있다.] 이 외에도, 쓰다가 중단한 소설들이 여러 개 있다. 전개가 잘 풀리지 않으면 그냥 연중하는 스타일이었떤 듯.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한국 최초의 [[SF]]작가로 유력한 사람이다. 1929년에 발표한 <[[K박사의 연구]]>가 한국 최초의 창작 SF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SF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뜸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한국 SF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가이다. 한국 SF에 대한 학술연구는 [[복거일]] 정도를 제외하면 작가, 작품별 연구보단 도입사, 변천사, 장르 자체에 대한 연구 위주로 주로 석박사 수준에서 논의된다.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한건 아동 SF문학가인 [[한낙원]]을 제외하면 복거일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문제 많은 성격 탓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염상섭]]을 비롯해 원수진 사람이 정말 많았지만, 제자 [[정비석]]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했다고 한다. 정서죽에게 비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김동인이었으며, 정비석이 쓴 소설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열심히 검토해 주었고, 예술이 아닌 통속소설을 쓰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똑같이 친일하는 김억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염상섭과 앙숙이 된 데는 김억이 염상섭과 먼저 사이가 나빴던 탓도 컸다. 의외로 [[카프]] 작가들과는 사이가 괜찮았는데, 카프의 유사 소설가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문인이었던 [[이기영(소설가)|이기영]]을 발굴하는 데 공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