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만철 (문단 편집) == [[탈북]] == 김만철은 12년간 북한을 탈출하기 위한 준비를 했는데, 해로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뒤에는 선의에 지원하여 배를 모는 법에 대해 알아내고, 배(청진호)에 대한 정보를 얻는 등 직접 몸으로 능력을 기르며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청진호의 경우 과거 공작선으로 사용되던 배로서 역할을 마쳤는데, 이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 직접 수리 기술을 익히고 보수를 하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자급자족할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대부분의 가족들에게 극비리에 계획을 진행했지만, 큰조카에게는 청진항에서 배를 타는 일을 하게 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도주 시 침투 방지 구조물(그물)이 있는 해역을 알고 피해가는 도움이 되었다.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김만철은 청진항에서 50t급 청진호를 몰래 탈취한 뒤 일가족 11명을 태우고 동해 한복판까지 도주했다. 온가족이 함께 탈출하기 위해서 투병 중이던 가족을 요양원에서 빼내오기까지 했다. 초기 계획에서는 적국인 한국으로 갈 생각은 없었고, 필리핀으로 간 다음 적당한 섬에서 생존 및 물자확보 존버를 하다가 브루나이를 거쳐 브라질로 갈 장대한 계획이었다. 여러 번 언급되는 '따뜻한 남쪽 나라' 라는 표현은 단번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제 3국을 전전하더라도 이상향을 찾아가겠다는 이러한 점진적 계획 덕이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길을 잃은데다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일본]]의 야마모토 근처에서 표류하다가 1월 20일,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은 김만철 일가가 승선한 청진호를 츠루가항으로 예인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전세계 언론에 보도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통역]]으로 하필이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간첩]]'''인 '마츠야마'를 보냈고, 마츠야마는 한국 망명은 위험하다고 위협하였다. 1월 22일, 김만철은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구하였다. 조총련 본부 간부들이 찾아와서 "한국에 가면 모두 죽게 된다." 라고 협박하였고, 이 때문에 김만철 일행은 망명지를 놓고 가족 간에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큰처남인 최정섭(30)(1957년생, 현재 [age(1957-01-01)]세)도 한국행을 주저하였다.[[https://youtu.be/obtqyZYGSa4|#]] 특히 처남은 그 때 배 안에서 [[단식투쟁]]까지 벌이면서 가족들과 험악해질 정도로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1월 23일, 해상보안청은 단순표류로 규정해서 식량 공급과 기관 수리 후 공해상으로 내보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로 기관수리 작업을 하지는 않았는데, 시간을 끌기 위한 발표였던걸로 보인다. 1월 24일, 북한 [[적십자|적십자사]]가 기관고장으로 단순표류한 자국민들이라면서 김만철 일가의 송환을 공식요구하였다. 1월 28일, 김창섭 나고야 총영사가 직접 선박에 탑승해서 김만철 일가를 만났다. 이때 김만철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요구하면서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와중에 물밑에서는 김만철 일가를 둘러싸고 대한민국-북한-일본의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은 초기에는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김만철 일가도 처음부터 명확하게 대한민국행을 요구하고 있진 않았다. 단지 이대로 있다간 북한에 끌려가서 무슨 짓거리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절대 북한만은 안 된다"'''는 일념으로 제3국 망명을 강력히 희망했다. 하지만, 정작 김만철 일가 내에서도 행선지가 합의되지 않았다. 북쪽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처음 탈북 때부터 김만철은 남한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남쪽 대표단의 설득으로 대한민국행을 결심하고, 이를 일가족에게 밀여붙였다. 이 당시 대표단에 [[김신조]]와 [[이웅평]]이 동행했다고 하는데, 서울을 찍은 온갖 사진과 필름을 보여주고, 이웅평은 자동차키 여러 개를 보여주면서 '''"나는 부모형제를 두고 홀로 내려와 이렇게 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는데, 댁들은 부모형제를 다 모시고 계시면서 왜 자유로운 남한으로 귀순하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저도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 꼭 대한민국으로 귀순을 하세요."''' 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특히 김신조는 김만철과 같은 동향인 청진 출신에다가 살던 동네까지 같았다고 하며, 김만철을 만나자 '''[[https://youtu.be/pvwFKuGDwy8?t=614|"만철이 형 아니오! 나 신조요. 정미소 집 아들."]]''' 이라면서 반가워했다고 한다. 반면에 조총련은 츠루가 해상보안청사에서 북송 촉구 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만]] 정부와의 협상을 계속한다.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김신]]이 비밀리에 특사로 파견되었고, 당시 총통은 [[백범 김구|김신의 아버지]]와 각별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였다. 협상 끝에 2월 3일, 단기체류 형식으로 김만철 일가족이 대만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장징궈가 김신에게 약속한 건 최소한의 시간(24시간) 뿐이었으나, 그 뒤 대한민국 정부가 끈질기게 협상해서 48시간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일본은 김만철과 그 가족들을 대만으로 추방했다. 2월 7일 새벽에 김만철 일가족은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에 도착했다. 이 순간까지도 김만철 일가족 중에서 남한행에 반대하면서, 애초 목적대로 따뜻한 남쪽 나라 제3국으로 가자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만철과 가족들이 대만에 머무는 시간은 오로지 김만철 일가를 한국으로 데려오고자 한국 정부가 설득한 시간이었고, 결국 이들이 한국행을 택하고 대만을 떠난 건 대만에 도착한 지 19시간만이었다. 다음 날인 2월 8일 오후 대한민국 정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작전을 통해 김만철과 그 일가족들을 [[김포국제공항|김포공항]]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http://www.yonhapnews.co.kr/special/2011/11/05/1438010000AKR20111105053700043.HTML|당시를 회고하는 기사]] 마지막까지도 최정섭씨 같은 경우엔 대한민국의 자유와 풍요를 진심으로는 믿지 않고 있었고, 어차피 다른데로는 못 갈 외통수인 상황이니 끌려갈 바에 맞부딪쳐보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