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명원 (문단 편집) == 평가 == 김명원은 행정 업무를 맡을 때마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군사와 물자를 확보하고 부대 건제를 정비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평양성 함락을 예측하고 신속히 순안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고니시군의 북상을 방지하는 전략적 안목도 보여주었다. 문제는 후방에서 이토록 탁월한 사람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전방으로 내몰 당시의 전황. 천상 문관이었던 그는 장수를 통제하고 군을 지휘하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모두가 [[권율]]처럼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문관에게 떡하고 야전지휘를 맡겨 전선에 세워버리니 지휘는 지휘대로 문제고 성격도 안맞아서 위아래 모두 힘들어졌다. 도원수 재직 시기에 비변사에서 종종 올라온 탄핵 사유는 '김명원은 성격이 유순해서 장수 통제를 못한다'였다. 즉 거친 무관들을 통솔할 과단성이나 뚝심 등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김명원은 애매한 위치에 끼어서 동네북처럼 비난을 들어야 했다. 조정에서는 제대로 공격도 안한다고 까고 장수 통제도 못한다고 깠으며, 김명원 본인은 임란 이전까지 정승을 지내지 못했는데 그 휘하에는 정승직을 경험할 정도로 격이 높은 장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부하들도 명령을 잘 들으려 하지 않아서 고생이 많았다. 오늘날에는 또 [[신각]] 사건의 악역으로 낙인찍혀 부당하게 까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한 지휘관이 셀 수 없이 넘쳐났던 정황 + 장계를 제때 올리지 않은 신각 측의 실책 + 예상 못한 대규모 외침과 전면 패주 속에 강경론이 득세하던 조정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교육용 만화책인 [[맹꽁이 서당]]에서도 취급이 좋지 않아 대놓고 까였다. 철수하는 과정을 신각보다 먼저 꼴사납게 도망치면서 후퇴 작전이라고 변명하는 모습으로 그려내거나, 신각에 대해 엄하게 벌할 것을 조정에 장계 올릴 때 '''"이래야 도망친 내 체면이 좀 서지!"'''라고 말한다든가. 맹꽁이 서당 자체가 역사 자료가 많이 부족하던 시절에 그려졌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 오해가 발생한 것. 임란 초기 조선측의 군 인사를 보면 실전 지휘는 [[도순변사]] [[신립]], [[순변사]] [[이일]]같은 무장들이 맡고 이를 총괄하는 역할은 도원수가 아니라 도제찰사인 [[류성룡]]이 맡으며, 도원수인 김명원은 류성룡을 돕고 신립, 이일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던 걸로 보이나 [[신립]]과 [[이일]]이 모두 단기간에 참패하며 도원수였던 김명원이 얼떨결에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최전선으로 내몰렸던 것이 문제로 여겨진다.[* 이 분업화가 잘 이루어진 좋은 경우가 [[이괄의 난]]이다. 명목상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장만]]이 후방에서 선전과 보급, 행정에 힘쓰고, 야전에서는 무관 [[정충신]]과 [[남이흥]]이 이괄의 반군과 직접 맞서 싸웠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신각]] 처형 사건의 도화선으로 오인되어 인터넷에선 부당하게 [[원균]] 급으로 까인다. [[상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에서 죽다 살아난 [[이일]]도 장계는 바로바로 보내서 조정이 긴급히 파천논의를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각]]이 너무 허술하게 처신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는데 어쨌든 공세우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 질타를 안하고 대신 김명원만 물고 늘어지고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명원과 신각의 일을 서술하며 신각의 죽음은 안타깝게 여겼지만(신각에게 90살 넘은 노모가 있어서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는 내용이 있다) 김명원을 비난하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