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민석(1964) (문단 편집) === DJ계로 정계입문 ===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민주당(1990년)|꼬마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당시 이 당에는 [[노무현]], [[이철]] 등도 있었고 후일 유명해진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물들도 있었다. 야구선수 [[최동원]]도 [[1991년 지방선거]] 당시 이 당에 입당해서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이기택의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민주당(1991년)|민주당]]에 참여했다. [[파일:external/www.ohmynews.com/jb020617-2.jpg]] 당시 민주당 당수이던 [[김대중|DJ]]에게 상품성을 높이 평가 받아 약관 27세의 나이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공천되어 출마하였다. 김대중의 전폭적 지원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60표차'''로 안타깝게 낙선하면서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보수 성향이 강했던 여의도동에서 표차가 크게 벌어진 게 패인이었다지만, 애초에 상대 후보인 나웅배는 [[산업통상자원부|상공부]] 장관과 경제부총리, 3선 의원을 역임한 여당의 중진 인사였다. 이런 거물을 상대로 '''27살짜리 정치 신인'''이 고작 260표차로 낙선했다는 건 당선 못지 않은 영광인 셈이다. 1993년 [[KBS]] 아나운서 김자영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94년 1월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 이수한 뒤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로 옮겨 행정학 석사[* 1년 기간의 MC/MPA, 정규 2년 정책학 석사(MPP)학위와는 다른 전문가 과정]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 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다시 서울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최불암]]''') 의원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이 낙선하면서 사실상 국민당이 해체되자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했던 것이었다. 이때는 전국구(16대 국회 이후의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해도 국회의원직 유지가 가능했다.] 꺾고 31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당시 김민석은 유세 중 "유권자 여러분께서 저 김민석을 선택해주신다면 [[김민석(정치인)|1등 국회의원]]과 '''[[최불암|1등 연기자]]'''를 동시에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김민석은 이 선거의 당선을 계기로 [[제15대 국회의원]] 중 최연소 의원이었다. 1997년 [[한보그룹]] 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제15대 대선 때는 단독으로 김대중 후보의 [[https://www.youtube.com/watch?v=9znhLW_62Ho|선거 광고를 찍을 정도였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로서 압도적 포텐셜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에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 나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며 [[386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김민석의 정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달고 무난하게 순항할 것만 같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