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병준 (문단 편집) === [[참여정부]] 시기까지 ===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강원대학교]] 교수를 거쳐 [[1986년]]부터 [[국민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주전공은 도시행정, 지방행정, 지방자치, 정책학이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시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지방자치, 지방분권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의외로 대한민국 정부는 제헌헌법에서 지방자치의 한 장을 설치하여 1952년 전쟁중에서도 강원, 경기 등 피탈지역을 제외하고 지방선거를 실시할 정도로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려 노력했고, 1960년에는 서울시 민선시장이 선출될 정도로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전두환에 이은 군사독재의 장기화로 지방자치는 뿌리뽑혔으며 서울특별시부터 부터 지방의 시군까지 관선제가 시행되었다.] 1994년에 저술한 '(한국)지방자치론'은 지금도 대학 행정학과에서 교과서로 널리 쓰인다. 2022년에도 전면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른 개정판이 나왔다. 이론 뿐만 아니라 실무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시민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지방자치론』, 『김병준 교수의 지방자치 살리기』와 같은 책을 썼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병준 교수의 지방자치론.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병준 교수의 지방자치 살리기.jpg|width=100%]]}}} || || {{{#e61e2b '''▲ 『지방자치론』 (2009)'''}}} || {{{#e61e2b '''▲ 『김병준 교수의 지방자치 살리기』 (2009)'''}}} || [[1993년]] [[노무현]] 당시 [[민주당(1991년)|민주당]] 최고위원이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주최행사에 강연을 맡으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1992년 국회의원선거 낙선 후 야인으로 지내며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에 관심을 가진 노무현에게 김병준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장으로서 지방자치 이론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김병준을 두고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꾸준히 정책자문을 해준 유일한 대학교수였다.”'''고 회고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자문학자 그룹의 리더로서 정책자문단장을 맡아 선거운동 전면에 나섰다. 충청권 수도 이전 공약이 김병준의 대표적 작품이다.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물건너 갔지만, 이 공약은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의 토대가 되었다. 노무현 당선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분과 간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신설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참여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지방분권 및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구체화했다. 2004년 6월부터 2006년 5월까지는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정책실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근저에서 보좌하며 참여정부의 경제, 사회정책을 총괄/주도했다.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은 [[문재인]]이었는데[* 요즘으로 따지면 두 사람은 [[문재인 정부]]의 [[조국(인물)|조국]], [[장하성]]의 관계라 할 수 있겠다.] 김병준이 후일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직을 맡게 되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참여정부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경험한 바로는 비중으로 치자면 김병준 실장이 위였고, 인간적으로 가까운 곳은 문(재인 민정)수석”이었다고 한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는 증언이 많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국회의원 되기 전에 부산에서 같이 활동했고, 김병준은 노무현이 92년 국회의원선거 낙선 이후 서울에서 같이 활동했기 때문에 활동반경이 서로 엇갈렸다. 청와대에서도 둘의 업무가 엄격히 구분된 편이었고, 문재인이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는 점도 둘의 소원한 사이에 한몫했다고 한다는 전언도 있다. 김병준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토론을 자주 나눈 사이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정황 상 노무현은 김병준을 깊이 신뢰했지만, 당시에도 정부여당 인사들은 김병준을 싫어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모 중진의원은 “당에서는 김병준을 아주 흉악한 인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청와대 참모 출신의 한 인사가 김병준을 ‘권력지향적이며 반개혁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184|#]] 이에 대해 김병준은 '(노무현 정부에는) 굳이 구별하자면 ‘노무현 좌파’와 ‘노무현 우파’가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 노무현 정부 업적의 많은 부분이 우파가 주도한 결정이었다면, 좌파는 그것에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3159363|#]]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김병준은 이 같은 '우회전'을 주도한 핵심인물로 볼 수 있다.[* 당시 참여정부에서 우파 성향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는 '''경제부총리, 교육부총리를 맡았던 [[김진표(정치인)|김진표]]'''가 있다. 이 외에도 이헌재, 진대제 등이 상대적으로 경제 쪽으로 우파성향.][* 다만 정확히 알아야하는게 참여정부는 속칭 친노 중에서도 직계라고 불리는 노무현의 핵심측근들의 국정 운영이 굉장히 강하게 주도되었던 정부다. 김병준이나 김진표라고해도 본인들만의 입김으로는 우회전을 주도했을수가 없다. 노무현의 최측근 인사인 친노 직계중 금강팀으로 불리는 안희정-이광재 역시 중도에서도 우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는 인물들이었고 참여정부 당시 징역을 이행하던 안희정을 제외하고 당시 정부에서도 핵심요직을 차지하던 이광재와 입을 맞추며 정책을 이행했다는게 정확한 평가다.][* 참여정부에서 친노의 대부분을 중도로 평가할경우 친노 직계를 중심으로 친노 좌파에는 문재인을 비롯한 부산팀, 유시민을 비롯한 당시 개혁신당과 참여정부 당시 영입인재 대다수가 있었으며 중도 우파의 경우에는 안희정-이광재를 중심으로한 금강팀과 참여정부 영입인재의 일부가 있었다고 할수있다. 김병준이나 앞에 언급된 김진표는 우파쪽의 인물이었다.] 김병준과 문재인의 갈등은 2006년 [[국무총리]] 지명 과정에서 표면화됐다. [[이해찬]] 총리가 3.1절 골프파동으로 물러난 후,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총리로 김병준 정책실장을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재인]] 민정수석 등 다른 인사들의 반대로 결국 [[한명숙]] 의원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도 김병준에 대한 청와대 여당 내 견제심리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7월 [[대한민국 부총리|부총리]] 겸 [[대한민국 교육부|교육인적자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에서 캐낸 제자의 논문 표절 논란에 휩싸였고, '논문 중복보고·중복게재' 사실이 드러났다.[* 다만 2016년 총리 내정자 기자회견에서 김병준 교수는 표절 논란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표절 절대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두 딸이 각각 [[대원외고]]와 [[대일외고]]에 편법으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357280|전, 편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논란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취임한 지 14일 만에 사퇴하였다. 당시 이와 관련하여 야당 및 야당인사들이 검찰에 김병준을 고발하였으나, 후에 무혐의 종결되었다.[[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685926583031176&mediaCodeNo=257&OutLnkChk=Y|#]] 2006년 10월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과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으로 컴백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5년 동안 청와대나 정부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은 노무현이 김병준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