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병화 (문단 편집) === 소련의 농장 지도자 === 김병화는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스(집단농장)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맨 몸으로 아무런 시설도 없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즈베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태였으므로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의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자흐]]로 이주한 사람들은 그나마 유목생활을 하는 부유한 [[카자흐인]]들이 제공한 임시주택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우즈베크는 워낙 주민들이 가난해서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이주 초창기엔 땅굴집을 파서 생활했을 정도로 열악했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40년]], 그는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우즈베크의 [[북극성]] 콜호스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연해주]]의 소작농이었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스 최적의 지도자였다. 그가 지도자로 부임한 첫 해부터 눈에 띄는 생산량 증가가 있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효율성이 떨어져서 80년대 말에도 4%의 [[별장|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얼추 추산해도 자영지의 효율이 7~8배 더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병화가 운영하는 [[북극성]] 콜호스는 다른 콜호스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생산량을 보여주었다. [[1940년대]]에, 농사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병화는 또 다른 사업을 진행했다. 바로 주택 만들기. 당시 북극성 콜호스의 한인들은 대부분 병영이나 간이 주택, 대피소 등에서 생활했다. 애초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의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내던져진 조건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호사이긴 하였지만 김병화는 만족할 수 없었다. 소련 정부는 [[대조국전쟁]] 중이라는 상황 속 버거운 국방비와 사회복지비로 인하여 안 그래도 예산이 후달렸던지라 지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북극성 콜호스는 10~15 헥타르의 농지에서 쌀을 재배해 그 수익으로 주택과 여러 건물들을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주택과 발전소, 축산을 위한 외양간이나 헛간이 많이 건설되었고 1945년에는 집에서 살지 않는 농민이 없었다. 당시 40년대 초반이 [[대조국전쟁]]으로 북극성 콜호스는 물론이요, 소련 전역이 정신없던 때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한편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우즈베크에서는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김병화의 북극성 콜호스 및 다른 한인 콜호스가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자신들을 고향 땅에서 내쫓고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보낸 스탈린이 아직도 정권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금을 한 고려인들의 [[대인]] 정신, 또는 나라 잃고 울타리 잃은 주민이 어떻게 되는지 뼛속 깊이 체감한 고려인들이 썩은 울타리나마 보존하려고 발버둥치던 서러움을 엿볼 수 있다. 소련 당국에서도 고려인들이 이렇게 충성심과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나갈 의지를 보였으니 그나마 단계적으로 한국어 출판물, 학교도 허락해 주고 훈장도 준 것이다. [[대조국전쟁]]이 끝나고 [[렌드리스]]도 끊겨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스는 높은 생산성을 보여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스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스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제거기 같은 농기계는커녕 '''[[비료]]'''도 안 보내줬다는 사실이다.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비단 북극성 콜호스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스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50년대로 접어들자, 소련 농업부가 갑자기 북극성 콜호스에게 주요 작물을 [[목화]]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그 전에도 목화 재배를 하고 있긴 했지만 소련은 계획경제국가이니 [[까라면 까|까라면 까야 해서]] 결국 재배하던 벼를 몽땅 갈아엎고 본격적으로 목화 재배를 시작하였다. 물론 결과는 엄청났다. 화학비료를 쓰기보다는 자연적 유기물질을 이용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였던 고려인들은[* 과거 한반도에서 농사를 짓던 방식이다. 사실 중앙아시아는 물이 부족해서 그렇지 지력은 한반도보다 훨씬 좋아서 한반도에서 하던 노력의 절반 이하로도 몇 배의 수확량을 올려서 농사지을 맛이 났다고 한다], 배수지와 삼림을 먼저 갖추는데 전력을 다한 후 본격적인 면화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번에 떨어진 목표량은 헥타르 당 2톤. 북극성 콜호스는 가볍게 목화 '''4.8톤'''을 찍어버려 생산량 두 배를 달성하였다. 그래서 스탈린이 사망한 해인 [[1953년]]에는 헥타르 당 5.2톤을 생산했고 전체 콜호스 계획의 132%를 달성하여 소련 전역에 그 위엄을 떨쳤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주변의 작은 농장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 김병화 버프가 발동하여 생산량을 뻥튀기해주었다. 아훈바바예프의 쿠츨릭 콜호스가 [[1952년]]에 북극성 콜호스에 가입하자 헥타르 당 1.3톤이던 생산량이 다음 해에 2.47톤으로 증가했다. 또 소련의 7개년 계획이 진행되던 중에 4년만에 14% 초과 생산을 찍기도 하였다. 덕분에 북극성 콜호스는 소련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콜호스가 되었으며, 농민들의 후생수준도 빠르게 올라갔다. 현대적인 문화 시설과 건물들이 계속 들어섰고, 학교, 병원, 보육원, 주택도 늘어났다. 여기에 콜호스에 1,000여 가구가 살았기 때문에 학교도 6개가 들어섰고, 우체국, 도서관, 미용실, 약국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현실사회주의]] 농장의 최종테크. 경기장과 전국구로 유명한 한인 극장도 생겨났다. 또 당시 모든 가구에는 전기가 들어왔고 라디오도 있었다고 한다. 북극성 콜호스에서는 B등급 축구팀도 있었다고.[* 소련의 축구 리그 체계는 50~60년대 기준으로 설명하면 소비에트 톱 리그라 불리는 클래스 A와 소비에트 1부 리그라 불리는 클래스 B로 분류된다. K리그로 치면 톱 리그가 K리그1, 1부 리그가 K리그2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클래스 A에는 소련 전체에서 16~18개 팀이 소속되어 있었다. 즉, 당시 김병화가 이끌던 콜호스에는 K리그2 급의 팀이 하나 있었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