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복동 (문단 편집) === 예편 이후 정치인 시절 ===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고 전두환의 처삼촌인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구속되자 대타로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노태우의 친인척 배제 방침에 따라 뜻을 접었고[[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416|#]][* [[노태우]]의 동서이자 자신에게는 둘째 매제인 [[금진호]] 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공부장관]]도 13대 총선에서는 출마하지 못하고 14대 총선에서 출마했다.], [[노태우 정부]] 말인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 [[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反) [[김영삼]] 진영에 섰으며[* 김영삼은 김복동을 아주 싫어하진 않은 듯 했지만, 김복동 본인이 [[김영삼]]은 '체질에 맞지 않다' 했다고[[http://m.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683020|#]]. 김영삼을 지지했음에도 [[김용태(1936)|김용태]]와 [[김윤환(1932)|김윤환]]에 밀려 딱히 대우받지도 못하고 노태우의 탈당으로 대구에서 반 김영삼 정서가 생겨나며 탈당했다는 말도 [[https://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382548.html|있으며]][[https://www.joongang.co.kr/article/2763895#home|#]], 김복동 자신도 대권을 꿈꾸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416|#]]], 결국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그 해 가을 고종사촌 동생 [[박철언]]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민자당 탈당 과정에서 매제(매부)인 노태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무작정 탈당계를 제출하는 바람에, 기자회견을 위하여 대구 지역구 사무실로 가던 도중 [[동대구IC]] 톨게이트를 지나 호남정유 주유소 앞쪽[[https://m.hankookilbo.com/News/Read/199211180020367524|#]][* 당시에는 동대구IC가 현 [[동대구JC]] 자리에 있었다. 중앙고속도로 대구-부산 민자구간 공사로 인해 구 IC는 분기점이 되고, 새로 동대구IC를 건설하게 된 것.]에서 '''경찰 관용차에 강제로 모셔져서 서울로 돌아오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663596|당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노태우가 직접 부른 건데, 이 과정에서 경찰이 개입해 강제로 끌고 오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건 초기에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661636|'''납치'''로 알려져 떠들썩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지금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실시간 연락이 어려웠고, 하필 손윗처남이 탈당한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노태우가 [[직권남용|경찰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그 뒤로 둘은 한동안 만나지 않다가 94년 1월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36832|노태우가 김복동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재회하게 된다.] 한편 탈당 과정에서 노태우의 친인척 중 가장 YS에 우호적이던 [[금진호]]는 자신의 보좌관을 시켜 탈당 번복 보도자료를 작성하게 한 다음 김복동 의원실의 여직원에게 각 언론사에 이를 보내도록 지시했고, 당연히 김복동의 보좌진은 탈당 번복 보도자료에 대하여 반발했다.[[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749872_30556.html|#]] 그렇게 [[https://m.mk.co.kr/news/home/view/1992/11/49424/|복잡한 과정을 거쳐]] 민자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해 정주영 후보의 선거 운동을 적극 도왔지만 [[제14대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결국 [[3당 합당]]으로 인해 막강한 세력을 갖추었던 [[김영삼]]이었고, 이듬해 출범한 [[문민정부]]와 민자당이 국민당 의원들을 대거 빼가며 와해공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끝끝내 당적을 바꾸지 않았다. 1994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으로 출범한 [[신민당(1994년)|신민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에는 [[자유민주연합]]과 합당하면서 신민당 대표 자격으로 자민련 수석부총재가 되었다.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 갑]]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당선된 [[김해석(정치인)|김해석]]과 [[윤영탁]]은 민주자유당으로 건너가서 15대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한 걸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잘 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하나회]] 소속이었던 육사 후배 [[이종구(군인)|이종구]] 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3위로 낙선했다. 2위는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신성일|(강)신성일]].]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DJP연합]]에 참여해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으며,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에 동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으며[* 이 때의 당선인은 이전 선거의 경쟁후보인 (강)[[신성일]].] 총선이 끝나고 불과 6일만인 [[2000년]] [[4월 19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병으로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000419/7527073/1|별세하였다]]. 향년 67세.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이 [[대구역]]에서 침산동, [[경북대학교]] 북문, 복현동, 불로동, 봉무동에 이르는 노선이 아닌 현재의 [[동대구역]] 경유 안심행 노선이 된 것에는 동대구역의 수요뿐만 아니라 [[동구 갑]] 출마를 준비하던 김복동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