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현(1935) (문단 편집) == 생애 == [[1935년]] [[12월 6일]],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상오리 호산마을에서 [[http://www.jangseong.go.kr/home/www/healing/introduce/healing_09/healing_09_09/healing_09_09_02|태어났다]]. 장성진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한영중학교]]를 거쳐 [[한영고등학교(서울)|서울 한영고등학교]] 야간부를 다녔으나 3학년 2학기 당시 중퇴했다. 1956년 [[김대중]]이 정치인 지망생이던 시절 운영하던 웅변학원에 등록한 학원생으로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김상현은 대한웅변협회 학생회장이었다.] 곧 사이가 가까워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동교동계 사람들도 김대중을 선생님이라고 높여불렀지 형님 소리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통 사이는 아니었다.], 김대중을 따라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59년 6월 재보궐선거 당시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한 김대중의 선거운동원으로 가두 연설을 담당했고, 이후 김대중이 [[민주당(1955년)|민주당]] 선전부장이 되자 바로 밑의 직책인 선전부 차장이 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는 [[김재광]]의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직 사퇴 때문에 치러지는 [[재보궐선거]]에서 [[민중당(1965년)|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서울]]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 당시 김상현이 내세운 이력 중 하나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대통령 내한 환영 국민위원장'''이라는 아스트랄한 직책이었다. [[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2|인터뷰 기사]] 근데 당시 그는 미성년자 고등학생이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서자 김상현이 김대중에게 대선 출마를 요청했다. [[경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면서 대통령 후보자 [[비서실장]]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참고로 해당 총선에서 그와 맞붙은 [[민주공화당]] 후보는 [[임택근]] [[아나운서]]이었다. || [[파일:KTYSandIDK.jpg|width=300]] || || [[3선 개헌]]에 반대하며 [[김영삼]], [[이기택]]과 거리로 나섰다.[* 가장 오른 쪽의 인물이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조윤형]], [[최형우(정치인)|최형우]], [[김한수(1935)|김한수]], [[김녹영]], [[이종남(1919)|이종남]], [[김경인]], [[나석호]], [[강근호]], [[이세규]], [[류갑종]], [[박종률]] 등처럼 모 군부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징역]]을 살았으며 출소한 이후 재야에서 활동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박종태]], [[양순직]], [[함석헌]] 등과 같이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꾸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본래는 신군부에서 그를 포섭하려고 했다 전해진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전두환]]과 술을 마시는 장면도 이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984년 당시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을 대리하여[* 단,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참여를 반대했다.]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고 공동의장권한대행을 맡았다. 1985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야권의 '선명야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신한민주당]] 창당에 앞장섰다.[* 당시 민주헌정연구회 등 재야에서는 총선 보이콧론을 주장하는 등, 새로운 야당 창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김대중의 의중도 비슷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측이 김대중에게 통일민주당 입당 및 경선을 요구했고, 김상현 역시 이를 수용하자는 입장을 보였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한다.[* 경선을 치르면 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당내 기반이 없는 김대중에게는 불리했다.] 이에 실망한 김상현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 김대중의 정치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한 동지였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사실상 둘의 관계는 단절됐으며 이후 1991년 꼬마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합류하기도 하나 합류 후에도 동교동계의 견제를 받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1997년]]에 자신은 국민회의 총재 선거에 출마하고, 대선 후보로 [[정대철]]을 밀기도 했다. 물론 둘다 김대중에게 박살났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김대중의 저격공천([[평화민주당]] [[김학민(1948)|김학민]] 후보)으로 야권 표가 분산되어 [[민주정의당]] [[강성모(1933)|강성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파일:EF21279D-F3A4-4C4C-BCAF-60995786DD38.jpg|width=100%]] || || '''1990년 [[노무현]] 의원과 함께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모습''' ||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따라가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1991년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무려 '''20년만에''' 원내복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 직후 [[정태수]]와 연루되었으나 1999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 지역구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우상호]]가 공천되었는데 만 65세의 5선 의원이 정계에서 용퇴하고 만 37세의 젊은 정치신인이 공천된 것인 만큼 세대교체의 이미지도 컸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에 입당하고 전국구 2번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당선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2001년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박광태]]의 광주광역시장 출마로 인해 지역구가 공석이 된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북구(광주)|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새천년민주당 [[분당(정치)|분당]] 때 [[열린우리당]]으로 옮기지 않고 잔류했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는 탄핵소추에 찬성하였다.[* 당시 [[안대희]] 전 대법관의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인하여 [[동교동계]]와 [[친노]]간의 갈등이 폭발한 상황으로 동교동계 인사 대부분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였다.] 이로 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7선에 도전했다가 탄핵 역풍에 휘말려 열린우리당 [[강기정]] 후보[* 내리 3선을 했고 훗날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된다.]에 밀려 [[낙선]]하였으며,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다만 아들인 [[김영호(정치인)|김영호]]는 이듬해인 2005년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거와 달리 본인은 그대로 2008년 총선 앞두고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한 [[통합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창당 직전까지는 새천년민주당에 개편된 [[민주당(2005년)|민주당]]에 잔류하였다.], 그 이후로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사망 전까지 상임고문직을 맡았다. 이후 2014년 8월 12일 자신의 오른팔격으로 평가를 받았던 고 박성수 전 동작구의회 부의장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에 영정을 붙잡고 통곡을 하였고, 이후 그 충격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2017 여름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투병생활을 하다 2018년 4월 18일 결국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 박성수 전 부의장은 지난 13대와 14대, 15대 선거와 2002년 재보궐선거의 선거자금을 지원하며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정도로 굉장히 각별한 사이라고 알려져있다. 특히 김상현 의원이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고 박성수 전 부의장이 항상 김 의원을 모시고 다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