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현(1935) (문단 편집) == 기타 == * 당시 군사정권과 대립각을 강하게 내세운 정치인이었지만, 특유의 범우주급 친화력과 인맥관리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친분이 두터워서 적이 없다시피 했으며 오랜 세월 정치권의 마당발로 통했다. 그래서 초선의원 시절 1934년 생으로 한살 연상이던 박정희 정권의 실세이자 [[민주공화당]] 내 초 강경파 의원인 [[차지철]]과도 [[친구]]를 먹고 허물없이 우의를 다졌으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주군 김대중과는 라이벌 관계이던 [[김영삼]]과 [[상도동계]] 인물들과도 친분이 상당했으며, 김대중이 13대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반발하여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통일민주당]]에 잔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3당합당]]을 단행하자 군사정권 잔당들과는 같이 할수 없다며 참여를 거부하며 이탈하였다. 이후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과 함께 [[민주당(1990년)|꼬마 민주당]]을 만들었다가, 야당 통합을 주장하면서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면서 한때 등을 돌렸던 김대중과 다시금 한배를 타게 되었다. * 정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대중의 비서로 시작해서 오랜세월 김대중과 호형호제하는 최측근으로, 원조 [[동교동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제 김대중이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때, 당내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유일한 현역 국회의원이었다고 한다.[* 보통 동교동계의 좌장으로 꼽히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는 모두 김상현보다 훨씬 뒤에야 의원뱃지를 달았고 이 시기에는 전부 김대중의 개인비서에 불과했다. 또한 현역 동교동계 정치인 중 하나인 [[박지원(1942)|박지원]]은 1981년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공천을 신청한 적도 있었고 이후 1980년대 중반에야 합류한 인물이다.]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독자출마를 명분이 없다고 반대한 것때문에 김대중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그뒤에 돌고돌아서 다시 한배를 타게 되지만 이후 김대중과 김상현의 관계는 그야말로 서로 철천지 웬수같은 관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김대중이 1994년 정계 복귀를 고민할때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등 다른 동교동계 중진들에 심지어 아직 국회의원도 아니었던 [[김근태]], [[정동영]]까지 만나서 의견을 들으면서도 정작 30년간 자신의 최측근으로 형제처럼 지내왔던 김상현은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대중 후보의 출마를 반대하며 또다시 김대중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김상현[* 독립운동가 [[정일형]]의 아들인 [[정대철]]이 당시 부총재였고, 그를 후보로 밀었다.]이었다. 이때 천하의 멘탈왕 지도자로 유명한 김대중이 경선활동 중 후보 정대철보다도 정대철과 연합하며, [[이승만]] 정부부터 40년을 사제관계 수준으로 지냈음에도 87년에도 이어 97년에도 자신의 대선출마를 반대하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의형제급 제자 김상현 때문에 분노에 치를 떨었다는 후문도 있다. 사실 당시는 한국 정당이 지금의 대표제[* 대표와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정해진 다수의 간부들이 당내 권력을 나누는 형태. ]가 아닌 총재제를 하고 있어서 총재와 대통령 후보를 동시에 뽑고 있었는데, 김상현은 총재 후보, 정대철은 대통령 경선 후보였고 둘이 연합을 했던 것. 그것도 김대중의 대선 마지막 출마를 노리던 97년에 김상현은 당시 "국민회의 하면 무조건 김대중이다 하는 말은 이제 없다 이겁니다", "국민회의가 다 김대중 총재 겁니까? 그런건 없지요"라고 이곳저곳의 유세장에서 마구 연설을 해댔으니, 김대중이 부들부들거릴만도 했다. 근데 시간이 더 지나고 막상 자신이 총재 선거도 불리해지자, 김상현은 거꾸로 정대철을 뒷통수치고 선거운동원들에게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는 김상현 뽑으셔야죠."라고 민주당원들에게 말하고 다니게 해서, 뒤늦게 이 소문을 들은 정대철도 뒷목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결국은 김대중이 총재와 대통령 후보 모두 당선 되어버리고 97년 대선때 대권까지 거머쥐면서 그 이듬해 김대중 대통령에 미움을 산 이 둘은 [[김대중 정부]]시절 모든 요직에 일체 등용되지 못하고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 [[파일:DN19990094-00_01345424.jpg|width=100%]] || * [[199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초청하여 골프회동을 가졌는데 이날 골프회동은 김상현 고문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양우(정치인)|이양우]] 변호사와 민정기 전 비서관도 함께 참석했다. 당시 5공 세력의 정치재개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현 여권과 연희동 측과의 모종의 물밑접촉이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78992_30729.html|국민회의 김상현 전두환 전 대통령 골프 회동]]] * 정치인 중에서도 [[애주가]]로 유명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이 점을 반영했는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전두환]]이 갑자기 안가를 불러내어 얘기좀 하자며 [[조니 워커|위스키]]을 따라 주자 "아무리 나를 때려 죽이려고 했다지만 술자리 예의는 예의지. 한 잔 받으시오."라며 서로 [[대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 아내 정희원 여사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3남 1녀를 뒀으며, 이중 [[삼남]]이 [[김영호(정치인)|김영호]] 의원인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과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서대문구 갑에 출마했다가 역시 탄핵 역풍으로 인해 낙선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서울 서대문구 갑 지역구 현역인 [[우상호]] 의원과 같은 당이 되자 조정하여 [[서대문구 을]]로 옮겼으나 현역인 [[정두언]] 의원에게 졌고, 19대도 그에게 졌으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2전 3기만에 드디어 정두언 의원을 꺾고 [[당선]]되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역시 당선되면서 재선 의원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