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원 (문단 편집) === 해방 이전 === 1893년 9월 29일 [[한양|한성부]] [[계동]]에서 [[탁지부]] 재무회계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재동으로 이사하여 6살 때부터 부친의 동료인 탁지부 대신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한학을 수학했으며, 1902년 관립재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졸업하고, 교동[[고등소학교]]에 입학해 1908년 졸업했다. 1909년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으나 7월 대한제국 군 해산으로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위탁교육 보낸다는 방침에 따라 1909년 9월 [[일본육군]][[https://ja.m.wikipedia.org/wiki/%E9%99%B8%E8%BB%8D%E5%B9%BC%E5%B9%B4%E5%AD%A6%E6%A0%A1|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5월 본과를 마치고 1913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병과는 [[보병]]으로, 제4사단 보병 제61연대([[와카야마]] 연대)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1915년 12월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연대장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중기관총 교관으로[* 당시 일본 육군의 [[3식 중기관총]], [[38식 기관총]]은 일본군 보병연대/대대의 핵심 화력이었기 때문에 지바현의 보병학교 교육을 이수한 중위가 맡는 보직이었는데 신임 소위를 앉힌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고 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sepido/222541326148|돈키호테 김석원]].] 2년간 복무했다. 1918년 4월 [[진명여자고등학교|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서달순(徐達順, 1900~1970,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60123002092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1-23&officeId=00020&pageNo=3&printNo=1974&publishType=00020|참조]])과 인천에서 결혼했고, 1919년 중위로 진급한 뒤 1920년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3%B0%EB%85%B8%EB%AF%B8%EC%95%BC_%EB%8B%A4%EB%A1%9C|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 [[조선군(일본제국)]]사령관(1918~1920)이 제4사단장 재임 시절(1916~1918) 예하 보병 제61연대를 시찰하며 알게 된 김석원을 조선군으로 끌어주어 제20사단 예하 보병 제78연대([[용산기지|용산]] 연대)로 전보되었다. 1925년 8월 대위로 진급하고 1927년 1대대 3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8년 1월 훈5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20사단 78연대 중기관총대 대장으로 만주에 출전하여 [[헤이룽장성]] 방면에서 [[마점산]]의 군대와 싸우면서 [[심양]]/[[장춘]]/[[치치하얼]] 일대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700원의 상금을 받았다. 1932년 조선으로 개선한 김석원은 출퇴근길에 보이는 아이들이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고, 이태원의 유일한 사설학원 '조양학원'의 이홍순을 찾아가 만주사변에서 희사받은 상금 700원 중 500원을 기부하면서 육영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어 김석원의 '''맹렬한 운동으로''' [[조선군(일본제국)]]에서 용산의 [[일본육군]] 용지 600여 평을 조양학원에 무료로 영구임대하도록 하여([[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477019340910e1045&set_date=19340910&page_no=4|#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469519340627m1058&set_date=19340627&page_no=5|#2]]) 1936년 6월 조양학원이 총독부로부터 정식 [[보통학교]]로 인가받아 이태원보통학교(現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2215&cid=40942&categoryId=34665|서울이태원초등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540319360605m1031&set_date=19360605&page_no=3|#]]). 이어 1937년 7월 31일에는 이태원보통학교 교장을 맡은 광산 재벌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과 사립[[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신청하여([[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582419370801e1021&set_date=19370801&page_no=2|#]]), 1938년 1월 10일 재단법인 원석학원 인가를 받고[[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598919380114m10210&set_date=19380114&page_no=2|#]], 동년 2월 25일 오늘날 [[성남중학교(서울)]]와 [[성남고등학교(서울)]]의 전신인 성남중학교(성남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4월 개교하였다([[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601119380205e1023&set_date=19380205&page_no=2|#]]). 1934년 3월에 소좌로 승진했으며 1936년 8월 보병 제78연대 3대대장으로 보임된 상태에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파병된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여단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선봉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북경]] 부근 남원 전투에서 자신의 대대 병력을 이끌고 국부군 '''1개 사단'''[* 다만 국부군은 중앙군 내에서도 일부 개편사(8천~1만)를 제외하곤 사단 대부분이 약간의 박격포와 알보병만 갖춘 3,000명~5,000명은 물론 2,000여 명에 불과한 부대들도 많았다. 물론 아무리 못해도 10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지만.]을 격퇴하고 남원행궁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려 전쟁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김석원 대대장도 총상을 입고 [[텐진]]의 병원으로 후송될 정도였는데, 그의 곁에 있던 아이가와(相川) [[군조]]가 그를 살리고 대신 총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는 [[아사히 신문]]의 종군기자의 원고를 통해 조선은 물론 일본제국 전역과 중국에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https://blog.naver.com/sepido/222541326148|출처]]). 이어 1938년 2월에는 산서성 동원고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하진/직산 등 산서성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며 한중일 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032700209202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03-27&officeId=00020&pageNo=2&printNo=6320&publishType=00020|당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기사.]] [[이종찬]][* 이 사람 역시 김석원처럼 참군인에 자신의 친일을 평생 반성했다.]과 더불어 금치훈장 공3급[* 공로가 있는 좌관(영관), 위관에게 수여되는 최상위 공급.]을 수여받은 단 두 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다. 1938년 9월 중좌로 진급했고 1939년 3월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조선인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대환영을 받았다. 1939년 10월 훈3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1940년 1월 [[히로시마]]의 보병 제42연대([[후쿠야마]] 연대)로 전속되었다가 1940년 12월 다시 지나전선으로 파견되어 산동성에 주둔한 독립혼성 제6여단을 거쳐 제남군사령부에서 간부교육대장을 역임했다. 1942년 2월에는 중일전쟁에서 세운 무공으로 수훈갑, 공3급 욱일중수장을 받았으며 1944년 8월 [[대좌]]로 승진하여 조선군사령부 평양병사부 제1과장으로 발령받았다. 일본제국 패망 당시에 최종 계급이 [[대좌]]로 당시 생존한 [[조선인 일본군]]으로 군 서열로 따지면 [[영친왕]](중장), [[홍사익]](중장)에 이어 다음이었다. [[이응준]]과 유승렬([[유재흥]]의 부친) 역시 대좌 계급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육사 26기로 김석원의 한 기수 선임이었다. 홍사익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되었고 영친왕이 귀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본군]] 출신 [[군경력자]] 가운데 [[이응준]]과 더불어 최고 계급자이며 중국군이나 광복군 출신까지 포함해도 이 정도 경력자는 드물었다.[* 당시 중국군의 김홍일 소장, [[박시창]] 대령, 최용덕 공군상교 (육군 중장 대우), 일본군의 영친왕 (중장), 홍사익 중장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군사경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야전으로는 중일전쟁에서 사단급제대를 지휘하여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는 김홍일 소장과 반대 진영(일본제국 육군)에서 1개 대대(2개 중대)로 사단병력을 물리쳐 용명(?)을 떨친 김석원이 전투 경력으로는 제일이었다.] [[파일:external/file2.nocutnews.co.kr/20150629143834205010.jpg]] > "용약! 군문에 진입하라. 홍대무변(鴻大無邊)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은 성스런 싸움터에 나가 죽을 각오로 영, 미 귀축의 적을 때려잡는 데 있다" > '이런 취지의 강도 높은 열변이 히틀러식으로 한두 마디 웅장하게 발성될 때마다 박수가 연발 터져 나왔다. 진짜 순도 높은 황군의 최선두답다. 반 시간 남짓의 열변이 토해지는 동안 청중들의 박수가 10여 차례나 장내를 진동시켰다.' > >- 부민관 학병권유 강연회에 관한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기사. [[태평양 전쟁]] 때는 [[이응준]]과 함께 학병참전 권유 강연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화신'이란 비난을 받은 이유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자사전 <망향>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학도병징집에 불응하다가 마지못해 지원하니 ""내 구두 심문관은 한국인 출신 金山錫源 중좌 였다. 심문중 내가 입대를 피하려다 나중에야 지원했다는 것을 나무랐던 것을 후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나는 이종혁과의 오랜 해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회를 맛보았다.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 김석원은 일본군에 투신한 조선군인들에게서 엿보이는 복잡한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잘 보여준 인물이다. 일본군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 기수 선배 '''[[김경천]]과 [[지청천]]의 가족'''[* '''이건 칭송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김경천과 지청천이 누구인지는 문서를 참조해 볼 것. 만약 김석원이 마음을 바꿨으면 일제로부터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음과 동시에 뼛속까지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을 것이다.]을 보살펴주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반송장이 되어 돌아온 육사동기 이종혁을 보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도왔다'''. 1944년 평양에서 강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를 탈취해 무장투쟁을 벌이려다 체포된 평양 학병의거 재판 때는 맨 마지막까지 재판정에 남아 지켜보다 형이 확정되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주도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상엽]] 씨의 증언이다. 함께 재판받은 태권도 원로 [[최홍희]]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훗날 회고록에서 일본군 복무 경험을 "무엇이 옳은지 분간 못하고 철없던 시절의 불명예로 여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친일경력 및 의혹에 대해 자기합리화나 일언반구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었다. 일제 당시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전의회(全宜會)의 등사판 인쇄회보 기관지인 전의회보(全宜會報) 발행인은 1917년까지는 홍사익, 18년이 이응준, 20년에 다시 홍사익으로 돌아가 22년까지 계속되고 다음이 김석원으로 되어있는데 [[http://parizal.egloos.com/4141293|항일운동 중인 지청천, 김광서의 가족에 대한 지원 부분와 두 사람에 대한 간접 응원이 서술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본인에 대해서는 '''"김석원은 여러분이 이미 다 아시다시피 다만 빵을 구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상태"'''라 기술하여 당시 그의 복잡한 심정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