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석원 (문단 편집) === 퍼포먼스 === * 6.25 전쟁기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젤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차고 다니며 최전선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러모로 열악한 창군초기라서 장교들에게 따로 권총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일본군도를 패용하거나 망토를 착용하고 유사시 일본도를 휘둘러 지휘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허나 미군 고문관들은 일본군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을 질색했다.] * [[채명신]] 회고록에 소개된 일화로, 개성 송악산 전투 당시 1사단장 김석원 대령이 전선시찰을 나왔는데 당시 중대장인 채명신 대위가 무전기로 통화하는 것을 호기심있게 쳐다보더니 '전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일본도를 빼들고 '''"대대포[* 일본군에서 대대지원화기였던 [[92식 70mm 보병포]]를 일컫는 말이었다. 아마 M1 57mm 대전차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지전에서 북한군 화집점과 토치카 제압용으로 M9 바주카포와 함께 일선에서 유용하게 운용되었기 때문.]는 토치카를 쳐라"''' 라고 일본어로 외쳤다는 등의 일화 등이 남아있다. 채명신은 그러한 김석원의 쇼맨십이 장병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자신도 뒷날 지휘력에 있어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 그 후 6.25전쟁이 발발하고 수도사단장에 임명돼 수도사단이 있는 충북 진천으로 가던 무렵 피난민 대열에 섞인 군경 장병들을 만났다. 이에 그는 군도를 뽑아들고 "군경들아! 나는 수도사단장이 될 김석원이다. 그대들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거늘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대들의 후퇴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늙으신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가! 돌아서라! 김석원이 앞장설 테니 북으로 가자!"라고 연설해 900여명을 규합해 진천으로 향했다. * 그리고 수도사단장에 부임 후 [[진천 전투]]에 참전하여 잣고개 일대의 고지 쟁탈전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김석원은 격전지 중 하나인 문안산으로 사단 지휘소를 옮긴 뒤 일본도를 들고 일선으로 나가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저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반면 미군 군사고문관은 위험하다며 2km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저들은) 나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 못했소.[* [[나폴레옹]]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병사들이 쓰러지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소."'''라며 고문관의 건의를 거절했다.[* 사실 이 방법은 최고 지휘관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려하는 것만으로 일대 병사들은 큰 힘을 받으나, 문제는 전사하는 순간 이를 대신 통솔할 부사단장조차 없으면 해당 사단은 통제 불능의 오합지졸로 전락하기 쉬운 치명적인 위험 역시 있었다. 이러한 위험성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최전선에서 독려하는 러시아군 장성들이 정밀 타격 무기에 당해 수명이 전사하고 지휘 체계가 와해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이런 정밀 타격 무기가 없는 시절에 전쟁을 치른 것이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간 위험을 무릅쓴 덕분에 문안산은 다음날에도 함락되지 않았으며 당시 18연대장이었던 장춘권 역시 김 사단장의 진두지휘와 독전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어 진천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 [[진천 전투]]때 일화로 정찰용으로 배치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들로 하여금 T-34를 공격하게 한 일화가 있다. 김석원이 장갑차와 전차의 차이나 그레이하운드의 무장 상태를 몰라서 그런건 절대 아니었고 전차 때문에 보병들이 겁을 먹으니 병사들이 전차와 구분하기 쉽지 않은 장갑차들이 달려가 위협사격이라도 좀 해주면 사기가 많이 올라갈 것이란 이유였다. 중대장 박용실 대위는 김석원과 지휘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장갑차 2대와 지프를 끌고 진천으로 갔는데 정말 효과가 있어서 장갑차를 본 병사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어둠을 이용해 접근하는 T-34와 밤새 사격을 주고받았는데 아침에 가보니 37mm 기관포탄이 T-34 한대의 궤도를 끊었고 견인하려던 병력들이 죽어있었다. 비록 이어진 적의 포격으로 장갑차 2대 모두 바퀴가 터져서 도랑에 굴러떨어지는 손실이 있었으나 수색용 장갑차로 기대 이상의 효과를 냈다.[* 육군독립 기갑연대사, 1997, 한남전우회, pp152~155에 수록된 당시 중대장 박용실 대위의 수기였으며 씁슬한 뒷이야기도 있는데 전차 1대에 10만원이란 상금이 걸려있어 연대장이 박대위에게 지급했으나 중간에 누군가 착복해서 박대위는 그 돈을 구경도 못해봤다.] * 《전투》(1985)에 수록된 제9연대 소대장 차규헌의 회고에 의하면 청주 방면에서 지연전을 벌이던 당시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사들을 보고는 불러 모아 모두 무릎꿇게 하였다. 누군지 몰라도 전쟁통에 정신머리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며 지나치려던 증언자에게도 "명령없이 후퇴한 너희 놈들도 이리와서 무릎을 꿇어!"하고 외치자 별 수 없이 꿇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은 김석원 장군. 김석원은 "너희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후퇴했단 말이냐? 상부의 명령 없이 후퇴한 너희 놈들은 모두 군법에 회부하여 엄단함이 마땅하다. 헌병!"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연대장 최석용 중령(만주군 출신)이 "연대장인 제가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라며 호소했고, 그제야 사단장은 "연대장이 철수명령을 내렸다면 좋소"라며 용서하였다. 당시에 김석원은 군법에 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기는 했지만 실제로 군법에 처하거나 엄단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즉흥 연설 이라던가 부상병 하나하나 손을 잡고 위문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단박에 끌어올렸다는 증언들이 다수 존재한다. * [[4.19 혁명]] 당시 성남고등학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당시 시국 때문에 경찰에게 학생들 관리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듣자 오히려 '''[[http://nasanha.egloos.com/11012395|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며 따지기도 했다. 교장으로 있던 당시에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되었는데 훈시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이 별은 부패하고 정신이 썩어빠진 놈들이 주는 것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받은 별을 분질러 내던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