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억추 (문단 편집) == 생애 == 김억추는 1548년 10월 23일 [[전라도]] [[강진군|강진현]](현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박산마을)에서 김충정(金忠貞)의 아들로 태어났다.[* 작천면 평기리 교동마을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http://www.gjon.com/news/articleView.html?idxno=7821|#]]] 1577년(선조 10) 알성시 [[무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무이 만호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 판관·사복시 판관, 진산·순창·초산 등의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로서 허숙(許淑) 등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지켰다. 이 때의 공으로 잠시 동안 안주목사에 발탁되었으나, 허위보고를 하고 군율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였다. 이후 계속 주사장(舟師將)으로 대동강을 지키다가 여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맡은 직무를 잘못 처리하여 교체되었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또 교체되었다. 1595년에 다시 만포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지만 무능한 무관이 큰 고을의 목민관이 될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로 고령진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로 교체되었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의 후임으로 정3품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어란포 해전과 [[명량 해전]]에 참전했으나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고, 결국 육지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였다. 이후 밀양 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종2품에 올라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가 되고 뒤에 제주 목사를 지냈다. 1609년([[광해군]] 1)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 무관의 품계) 행(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종4품)을 지내다가[* 차남 김여현(金汝鉉, 1586 ~ ?)의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609_150016|1609년 무과방목]] 참조.] 벼슬을 그만두었고, 강진군 박산마을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