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억추 (문단 편집) == [[난중일기]]상의 기록 == >9월 8일 (양력 10월 18일)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 일부 사람들을 이 표현을 보고 이순신이 김억추의 능력을 폄하했는지 아니면 그나마 좋게 평가한 것인지 의문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굉장히 엄격해서 후대에 전공을 높이 평가하는 [[유정(조선)|사명당]]이나 [[곽재우]]를 각각 협잡꾼 & 평범한 인재로 평가할 지경이었다. 평가하는 기준이 엄격하기도 하지만 수군에 들어갈 경우 바다에 빠져 죽으면 묘도 없이 그대로 수장행이었기 때문에 많이 기피하기도 했다. 여기에 휘하에 들어오는 의병들이나 장정들은 쉽게 받아들였지만 반대로 인력을 빼가는 의병장들에 대해서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감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 뿐이다.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명량 해전]] 당일) <갑진> 맑다. >(전략)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무기)|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