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연자 (문단 편집) == 데뷔 전 == [[1959년]] [[1월 25일]]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시]] [[사직동(광주광역시 남구)|사직동]][* 1959년 당시 광주에는 구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때였다, 1973년에 광주에 구제가 시행되면서 동구와 서구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1986년에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에 광역시 승격과 동시에 남구가 서구에서 분구되었다.](現 [[광주광역시]] [[남구(광주)|남구]] [[서동(광주)|서동]] 145-21)에서 태어났다.[* 허나 김연자는 [[https://www.facebook.com/aboutyg/videos/1088020111630274/|2020년 06월 21일]], 1박 2일 방송 분에서 방문을 추천하는 지역으로 "제 고향 전남 영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영광에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전남"을 고향이라 말한 것일 수 있다.] 큰집과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 집에서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며 둘째인 김연자의 엄마에게 밖에서 낳으라고 해서 엄마는 마당에서 김연자를 출산했다. [[https://youtu.be/SjLeIsjfX6E|tv조선 마이웨이 83회]]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는데 김연자가 5~6세 때부터 매일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단골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연자야 노래 불러라"고 외쳤다고. 아버지는 이발소 영업이 끝난 후에 가게 안에서 1시간 동안 전축으로 [[이미자]] 노래를 틀고 김연자에게 연습하라고 한 뒤 나갔다고 한다. 국민학교 3학년 쯤 큰엄마가 내일 광주공원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라며 참가금 2~3백원을 줬는데, 당시 김연자의 용돈은 10원이었다. '어린 나이에 유행가 부르면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동요를 불렀는데, 떨어져서 참가상으로 소주 1병을 받았다고 한다. 참가금으로 큰 돈을 줬는데 상을 못 탔다고 큰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요교실 학원[* 김연자의 소속사 대표이자 연인인 홍상기는 어릴 때 광주에서 김연자와 같은 음악 학원을 다니며 노래 연습했는데, 여기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엔 김연자는 홍상기를 몰랐다고 한다. 무료로 배운 김연자와 달리 홍상기는 논밭을 팔아 배워서 김연자를 알고 있었다.] 선생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니 무료로 다니게 해줘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5년을 다녔다. 또래 친구들은 동요를 좋아했지만 김연자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광주의 대표적인 노래 대회였던 <벚꽃 노래 자랑>에 친구 정우순과 함께 출전했다. [[https://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D%8E%84%20%EC%8B%9C%EC%8A%A4%ED%84%B0%EC%A6%88&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97435|펄 시스터즈]] 등이 똑같은 옷을 입고 노래하니까 우리도 똑같은 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옷을 맞춰줬고, 인기상을 탔다. <벚꽃 노래 자랑>은 생방송으로 진행됐던 프로그램이라 많은 광주시민들이 시청을 했고, 그 후 수피아여자중학교에 입학하니 노래자랑에 나왔던 김연자를 알아봤던 학우들이 있었다고 한다. [[파일:김연자ㄴ 002.png]] [[파일:19 김연자 가족.jpg]] 중학교 시절에는 오락 부장이었다. 선생들이 자주 교단에 불러내 노래를 시켰다고 한다. 1973년 14세였던 중학교 3학년[* 중학교 2학년 때 상경했다는 인터뷰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중학교 3학년 때가 맞는 듯 하다. 또다른 인터뷰 기사에선 1974년 중학교 3학년 때 TBC '가요신인스타'를 우승한 후 가수가 되기 위해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에서 서울로 갔다고 하는데 [[https://news.joins.com/article/4237349|#]], 여러 자료를 취합해 보면 먼저 서울로 가서 생활하다가 '가요신인스타'에 출전한 게 맞는 듯 하다.] 2학기 때는 열흘 정도 공연장에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쇼를 다 보고 학교에 왔더니 수업 미달로 정학을 당했고, 아버지가 차라리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가서 가수를 하는게 어떻냐며 열차표를 직접 사줬고 한다. 엄한 아버지를 무서워했기에 거역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김연자는 홀로 상경했다. 서울에 상경한 그녀는 [[미아리]][* 그녀의 애창곡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의 작은아버지 집의 작은 방에서 작은아버지 내외, 사촌동생 4명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허나 광주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가수 유망주였으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작은 아버지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다 떨어졌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쇼에 가서 조카가 노래하니 써주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다녔지만 모두 탈락. [[나훈아]] 콘서트에도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고 한다.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따라서 상경하여 단칸방 사글세 살이를 시작했는데, 옆집에 부유한 수양엄마[* 김연자는 2019년 'TV는 사랑을 싣고'를 통해 수양엄마와 재회했다.] 집에서 매일 전축을 틀고 노래 연습을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계속 낙방하여 답답한 마음에 상경한 어머니를 따라 관악산 어느 절로 올라갔고, 그 절에 있던 스님이 '21세에 꽃가마를 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는 김연자가 출세하기 시작한 나이와 비슷하다. 동향 출신의 선배 가수 [[이영숙(가수)|이영숙]]의 소개로 청계천에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 1952년 창업한 국내 최장수 음반사. 나훈아, 송대관이 속했었다.]> 사장에게 오디션을 봤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부른 것으로 기억한다는 김연자는 그 자리에서 드디어 합격한다. 하지만 말은 합격인데 가난한 집안에 수입이 없는 김연자의 처지를 안 사장은 데뷔가 아니라 회사 3층 공장에서 월급 2만원에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일을 시킨다. 일하다가 1시간은 2층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작곡가 김학송에게 노래를 배우며 지냈다. 어느 날, 오아시스레코드에서 한 평론가가 어느 카바레에 신인가수가 필요하다며 오디션을 권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비어홀, 카바레 등 3곳의 밤무대에서 월 6~7만원을 받으며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엔 유명 가수가 노래하고, 무명인 김연자는 한가할 때 노래를 했다. 당시엔 이미자와 목소리가 비슷해 '제2의 이미자'라고 내세웠다.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은 없었고, 딸이 가수가 됐다며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고 한다. 남들은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 자신은 서울에서 노래를 해야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사회인이 되어버려 학생의 청춘이 없었다고. 결국 김연자는 경제적 가장 역할을 하여 두 동생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한다. 물론 나중엔 가수가 되게 해준 아버지께 고마워한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