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연자 (문단 편집) === 무명 시절 === [[파일:김연자ㄴ 005.png]] [[파일:김연자ㄴ 006.png]] [[파일:김연자 7.jpg]] 1974년 [[동양방송]](TBC) <가요 신인 스타[* 이름에 쇼 or 전국이 붙어 얘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동양방송이 전국구가 아니라 수도권과 동남권 위주로 방송되었고, 당시 신문 기사에는 "가요 신인 스타"라고만 지칭함을 봐서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가요 신인 스타>로 보인다.]> 오디션 쇼. 매주 금요일 예심에서 뽑힌 4명이 tv에 출연해서 우수 가수로 뽑히면 메달을 딴다. 메달을 따서 올라가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 메달을 3번 따면 "신인 스타"가 되어 1년간 TBC 전속 가수로 활동한다. TV를 보니 노래자랑에 의상을 입고 2절을 부르는 게 멋있어서 김연자는 출전하기로 결심했다. 김연자는 <9월의 노래>를 불렀는데 "패티김 노래 불렀지만 이미자랑 똑같구만"이란 심사평을 듣고 떨어졌다. 집에 왔는데 PD가 재도전해 보라고 전화했다고 한다. "저 그 노래밖에 모르는데요?"라고 김연자가 대답하자 PD는 그 노래로 다시 나오라고 했고 김연자는 나갔다가 합격했다. 패티김 노래를 고른 이유는 광주에서 노래자랑 여기저기 다녀 보니 트로트를 부르면 떨어지고 발라드를 부른 사람이 붙어서라고 한다. 합격한 뒤로 손진석 사장이 첫 음반을 취입해주었다. 1974년 8월 30일에 제작 발매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87667&cid=60487&categoryId=60495|데뷔 앨범]]은 그녀의 독집이 아니다. LP의 B면에 김연자의 노래를 넣고, A면에 민정일의 노래가 들어갔다. 김학송이 작곡한 《말을 해줘요[* "말해줘요"라고 잘못 소개된 경우가 많다.]》가 대표곡이다. 15세에 그녀의 첫 노래이자 앨범이었다. [* 제작 또는 발매일이 1974년 10월 3일 가요신인스타 쇼에서 메달 3개를 따 우승한 후인 것으로 얘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10월 7일 기사에 김연자가 취입한 곡으로 말을 해줘요가 있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데뷔앨범은 우승하기 전에 예심 합격이나 첫 메달 획득 후에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이제 김연자는 이 노래를 잊어버려 못 부르고 음반도 안 갖고 있다.[[https://youtu.be/AgKpXQxOECE?t=1304|#]] 다행히 오아시스레코드 사의 마스터 테이프 디지털화 작업을 거쳐 유튜브에 공개되어 들을 수 있다. [[https://youtu.be/Y0ovEtqh2xc?t=812|데뷔 앨범 듣기]] 공장 일은 신곡을 내면서 관뒀다. 다섯 번/세 번[* 인터뷰마다 말이 다르다]의 도전 끝에 1974년 10월 3일 <가요 신인 스타>에서 [[패티김]]의 「[[살짜기 옵서예]]」를 노래해 우승[* 메달 3관왕을 말하는 듯.]했다. 이 날을 데뷔일로 정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2445307|#]] 당시 이 쇼에서 "신인스타"로서 최연소 기록을 세웠으며 김연자가 불렀던 다른 노래는 「수원 처녀」.[[https://news.joins.com/article/1388066|#]] * 무슨 노래를 불러도 이미자 창법이어서 개성이 없다고 비판 받았으나 이미자는 그녀에게 드레스를 줄 정도로 아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지요. 그런데 가요계에 아는 사람이 없어 고생만 했어요. 생활비 때문에 나이를 속이고 카바레에서 노래 부르기도 했고요. 너무 빨리 사회인이 돼 청춘이란 것이 없었어요." "우승하고 임하룡·한무랑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나갔는데 금방 잘렸어요. 제가 밤무대 행사를 뛰느라 목소리가 다 상했거든요. 가족들이 다 저만 바라보는데 먹고살 돈은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때 개그를 더 했으면 제가 연기자로도 진출했을지 모를 일이죠.(웃음)" *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트로트를 부르다 보니 미니스커트 입고 노래하는 또래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1975년 같은 회사[* 오아시스 레코드]에 있던 [[송대관]]의 <[[해뜰날]]> 코러스 녹음한다. 여성 합창단을 원했지만 가난한 작곡가와 데뷔 후 히트곡이 없던 송대관은 돈이 없어 값싼 김연자를 썼다. “작곡가가 시간 있으니까 김연자와 동료에게 코러스를 해보라고 해서 했다. 나중에 송대관에게 ‘내가 코러스 했던 거 기억나느냐’고 물어봤더니, ‘기억이 안 난다’ 해서 섭섭했다” 1976년[* 1973년이란 말도 있고, 김란영이 고1 때라는데 1963년 9월생이라는 것과 계산이 맞지 않는다. ] MBC 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출전했다. * 함께 출전했던 당시 고1이었던 김란영 왈 : “당시 김연자씨 창법이 지금과 달랐어요. 간드러지는 게 아니라 성량이 아주 풍부했어요. 그렇게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죠. ‘잘못 왔구나’ 싶었다니까요(웃음).” 하지만 김란영이 대상을 받고, 가수로 데뷔한다. 1976년 오아시스레코드 - <엄마의 노래 / 나를 보고 있네요> 1976.12.03 오아시스레코드 - <[[http://www.maniadb.com/album/103657|김연자 독집 "봄비가/낯선 얼굴들"]]> 제작 '봄비가'가 히트 조짐을 보이던 즈음[* 조짐만 보이고 그친 듯 하다.] 김연자가 일본에 갔다는 말이 있다. 1977년 TBC 「전국남녀가요신인 콩쿨」 우승 당시 일본에서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란 말이 많았다.[* 엔카의 기틀을 세운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이자 작곡가인 [[코가 마사오]]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민요를 배워 이를 엔카에 접목시켰다. 1977년 일본에서 [[이성애]]의 <가슴 아프게(1976)>가 대히트 쳤다. 일본 가요계에서는 ‘엔카의 바탕을 한국의 가수 이성애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면서 극찬했다, ‘이성애’는 당시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8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기획상을 받았다] 일본의 토리오(trio)레코드사가 [[이성애(가수)|이성애]] 같은 한국인 가수를 데려오려고 서울에서 연 오디션에 김연자는 합격한다. 일본행을 어머니는 찬성하고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김연자는 당시 심적으로 힘들었고 밤무대 외의 비전이 안 보이던 생활과 가난을 벗어날 돌파구를 원했다. 비자가 안 나와 10달 이상 기다리다가 1977년 8월 일본에 간다.[[https://youtu.be/h3pBv7w4Z_g|채널A_분노왕 28회]] 하지만 일본에서도 일본어도 모르고 힘들고 외롭고 한국에 가고 싶다며 매일 울며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당시 직장인 월급이 12만 엔이었는데 전화세가 30만엔 나와서 회사한테 혼났다. 초기엔 향수병에 시달렸다. 술만 먹으면 집에 가겠다며 여권을 들고 집 밖에 서 있었다. 다행히 동네에 택시가 잘 안 다녔다. 그리고 한국이 욕먹는 게 싫어 참고 이겨냈다. "내 이름은 들리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니 나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파일:1977 일본 김연자 여자의 일생.jpg]] [[https://www.discogs.com/キムヨンジャ-女の一生/release/15453485|일본 데뷔 싱글 음반]] 1977년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리메이크한 《女の一生[[http://blog.naver.com/sinschul/220581691673|(듣기)]]》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http://lpcd.co.kr/lpcd/commerce/contents.asp?code=921714437|일본 데뷔곡 수록 앨범]] 토리오 레코드사가 2만엔을 아사쿠사 공회당에게 줘서 첫 무대를 가졌다. 3년 전속 계약으로 회사가 월급과 의식주를 제공했다. 히트치지 못해서 스케쥴이 별로 없었다. 1년만에 일본어와 글에 능숙해졌다. 1978년[* 1977년이란 말도 있음. 처음 일본 진출했을 때란 말을 오해해서 일본에 간 첫 해로 착각한 것일 수 있다.] 김연자는 방송에 출연했다가 훗날의 남편 金好植(김호식)과 처음 만난다. 스튜디오에서 자주 마주쳤다. 남편은 첫눈에 천생연분이라 느꼈다 했다. 김연자도 처음부터 끌렸기에 같은 성이지만 본관이 다름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는 재일교포 2세이자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지휘자이자 악단장. "제가 방송무대에 출연했다가 남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그때 나이도 어린데다가 낯선 외국 땅이라 모든 것이 쑥스러고, 기도 제대로 못 펴고 있었거든요.그런데 하루는 누군가가 다가와서 한국말로 아주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는거에요. 깜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바로 밴드 지휘자였어요. 그때 누군가와 한국말로 대화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웠죠." 엔카를 부르면서 밝고 여리며 하늘하늘 꺾는 창법을 익혔다. 트로트 창법과 접목시켜 감칠맛 나고 독창적인 목소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folding 【일본 활동 사진 펼쳐 보기 & 접기 】 [[파일:김연자ㄴ 008.png]] [[파일:김연자ㄴ 009.png]] [[파일:김연자ㄴ 010.png]]}}} 1979년 2월 19일 오아시스레코드 - 김연자 독집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4386327&cid=60487&categoryId=60495|<두손을 잡아요 / 먼 훗날>]] 일본 소속사가 주는 월급은 25만엔이었는데, 20만엔은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봉투 붙여 생활비를 하고 연자가 보낸 돈을 모아서 빚을 보태 연립주택을 샀다. 김연자가 비자 때문에 6개월마다 귀국할 때마다 사글세, 월세, 전세로 집이 이사해 있었다. 일본 데뷔 3년만에 한국에서 재계약을 기다리는데 해고 통보를 받는다. 일본 회사 사람에게 “3년 동안 히트도 못하고 월급만 나가는 가수"라는 말을 들었다. * 훗날 김연자는 해고 사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할 일 없어 먹기만 했더니 턱이 3개가 될 정도로 살쪘다. 남 보기에 쟤가 가수 될까?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 같다. 일본 풍습을 전혀 몰랐어. 사고방식 차이로 매니저와도 많이 싸웠어. 수도 없이 허리 굽혀 인사해야 하는 풍습도 '아부'로 생각됐어. 당시 술집을 돌면서 한 곡 부르고 음반 한 장에 7백엔씩 파는 '밤의 캠페인'이 있었는데 너무 싫었어. 항상 '한국인'을 앞세웠지. 일본에 맞추려 하지 않고 '한국 사람인데 왜 저래?' 내 고집만 부렸던 것 같다.[[https://youtu.be/PY-d8YfJBuo?t=1840|tv조선 마이웨이]] 그러다 79년 일본에서 먼저 활동하던 [[이성애(가수)|이성애]] 선배에게서 '로마에선 로마식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됐지." "무명기간이 7년이었다. 4년은 한국 무명, 일본에서 3년 무명이었다." 귀국 후 김연자는 1년간 놀았는데,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던 남편이 김연자에게 생활비를 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