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한(사업가) (문단 편집) === 백석과 동거와 이별 === 김영한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의 11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주장했으나, 증거자료를 전혀 내놓지 못하였다. 백석이 최고급만을 걸치는 패셔니스타에 결벽증이 있을 만큼 깔끔한 성격이어서, 그런 데서 살림을 차려 자고 먹을 사람이 아니다. 당시는 [[편지]]로 연락하는 시대라서 백석의 지인들만 해도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많을 정도로 백석은 편지를 자주 썼는데, 연인에게 편지 1통도 남기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지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백석은 1939년 1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부잣집 딸과 혼례했다고 하고, 김영한은 [[중국]]의 [[베이징]],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등지를 1달 동안 여행했다고 한다. 백석이 결벽에 가까운 성격이라 과연 [[기생]]을 사귀었을지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백석이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명문학교를 다닌 부유한 집안의 신여성들이었다. 첫사랑이었던 란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첫 아내 역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2번째 아내 문경옥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그와 어울렸던 여류 문학가들 역시 모두 당대의 신여성들이었다. 김영한은 "백석이 홀로 [[만주]] [[신징]]으로 떠났고, [[8.15 광복|해방]] 후 백석이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 후 [[정주시|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 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실제 그 기간 동안 백석은 북한의 유명 여성 음악가인 문경옥과 결혼해 2년간 결혼생활을 하고 이혼했으며,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아내 리윤희와는 이후 50년간 해로한다. 김영한은 "백석은 다섯 여인보다 나를 사랑했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