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옥균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金玉均.jpg|width=100%]]}}} || || {{{#ffd700 '''1894년 3월'''}}} ||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 >김옥균의 묘비명[* [[박영효]] 혹은 [[유길준]]이 썼다고 한다.] >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천하를 훤히 다 비추는구나."''' >---- >김옥균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출생으로 [[안동 김씨]] 김병기[* 안동 김씨의 세도가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金炳'''冀''')와는 다른 인물이다. 김옥균의 양부는 김병기(金炳'''基''')로 김좌근의 조카에 해당한다.]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대단했던지 [[달]]을 보고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문과 알성시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개화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 사상을 배우게 되고 고종의 매제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고 17만 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는데 일본으로 직접 건너간 김옥균은 [[청불전쟁]]으로의 동향을 미리 살펴보는 일본 정부한테 당시 300만 원의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 했지만 차관 교섭 자체에 실패했다. 차관 교섭 실패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급진 개화파는 동력을 상실하고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불을 내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와중에 수구파로 전향한 옛 동지 [[민영익]]도 다쳐 정동 [[미국]] 공사관으로 후송된다.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공표한다. 하지만 창덕궁에 [[원세개]]의 [[청나라]]군 1,500여 명이 들이닥친다. 이를 막아야 할 일본군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어겼다. 급히 몸을 피한 개화파들은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올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김옥균은 [[개명]] 후 [[망명]] 생활을 한다. 이때 정변에 적극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 친아버지 김병태(金炳台)는 정변 한 달 뒤인 [[1885년]] 1월 체포되어 천안옥사에서 10년간 복역하다가, 도피 생활을 하던 아들 김옥균이 암살 당한 시신으로 돌아와 부관참시된 지 한 달 뒤 고종의 명에 따라 [[1894년]] 73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는 [[1776년]] [[정조(조선)|정조]]가 선포한 ‘노적(孥籍) 추시 금지’ (연좌처벌 금지)에 위반되는 불법 처형이었다.[[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3/22/FQO3UEAS5RESFKQLYULQCTZRHU/|#]] ] 동생 김각균(金珏均) 역시 [[감옥]]에서 옥사하고 어머니는 음독자살했다. 여동생 김균은 죽은 것으로 위장해 겨우 몸만 피한 뒤[* 김균의 남편 송병의가 거짓 장례까지 치러 아내가 죽은 척한 뒤 부부가 함께 지방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균이 어머니와 동반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고, 나무위키 해당 문서에도 그 잘못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지방을 떠돌며 어렵게 살다 서천군 판교에서 1941년 사망할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https://www.newss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371|#]] 아내 정경부인 [[기계 유씨]] 유치상(兪致庠)의 딸과 김옥균의 딸은 살아남았으나 노비가 되고 만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긴 하지만 1895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 자체가 혁파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신원되었을 것이다.] 양아버지 김병기도 [[연좌제]]로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고 [[사약]]을 받을 뻔했지만 김옥균을 [[파양]]해 연을 끊는 형식으로 유배형과 사약은 면했으나 감옥에 수감되어 옥사한다. 김병기의 경우 허직이 정변과는 무관하니 [[사면]]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음에도 고종은 거부했고 결국 수감된지 7년 만에 감옥에서 옥사한다. 안동 김씨 [[문중]]은 균 자 [[항렬]]을 전부 규 자로 바꿔야 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가만두지 않고 계속 죽이려 했고 일본에 2번이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인 [[지운영]]을 몰래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지운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된다. 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변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제도|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가 풀어준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난잡한 [[여성]] 관계와 [[유흥]]을 시작한다. 망명 직후 기거하며 신세를 지던 '야마구치 신타로' 집의 모친과 관계를 맺어 [[임신]]시켰고 온천과 여관을 오가며 [[홍등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타루에서 사귄 일본 기생을 데려다 [[동거]]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 뒤에 [[한량]]처럼 지냈다. 이때 동지이자 절친한 후배 [[박영효]]가 김옥균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조선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자객 위협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바보 흉내를 내라”는 친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는 말도 있다.[* 구스 겐타쿠, ‘김옥균’, 윤상현 역, 인문사, 2014, p77] 그러던 김옥균은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이홍장의 양자)의 설득에 넘어가 청나라로 건너갔다.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자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낮잠을 자던 김옥균은 수구당 [[민영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파이며 갑신정변 때 죽은 동지 홍영식의 [[친척]]인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고 곁에 두었다. 암살 당시 김옥균은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 홍종우가 꺼내 쏜 [[권총]]에 3발을 맞고 절명했다고 보고됐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 [[파일:external/t1.daumcdn.net/daggbz1zzMPkZNtA32qDEg_Of8k.jpg|align=center]]] 김옥균의 암살 순간은 사극마다 다른데,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 외 대다수 작품들에선 독서하다 총을 맞은 걸로 나왔지만 2002년 <명성황후>에선 가만히 있다가 총을 맞은 걸로 나왔다. 홍종우는 암살 직후 도주하다가 출동한 청국 경찰에 일단 체포되지만 조선과 청 정부 간의 협의로[* 조선에서 청국에 엄청난 [[뇌물]]을 썼다.] [[방부제]] 대용의 [[페인트]]를 덕지덕지 칠한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국내 송환되었고 조정에서 포상과 함께 공직에 등용된다. 1894년 양력 4월 14일 김옥균의 시신이 조선으로 송환되었고 곧바로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형|거열]]되어 찢어진 후 목만 따로 [[효수]]돼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이 붙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잔혹한 처리에 대해 국내외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왜냐면 당시 조선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반역]]죄 소급 적용에 대해 [[영조]] 대부터 문제가 제기되었고 [[정조(조선)|정조]] 때 성문화되어 폐지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옥균의 사지를 찢고 목을 효수한 것은 근대법체계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의 실정법상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에게 맺힌 게 많았던 조선 조정의 보수파 관료, 민씨 척족들이 대명률에 역도는 능지처사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식자층의 반발은 당연했다. 나아가 송환된 김옥균의 시신을 부관참시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주재 각국 외교관들은 곧바로 회합해 조선 정부에 시신 훼손 불가 의견을 내기로 결정했으나,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들 의견을 취합한 때는 이미 조선 정부가 시신 훼손을 결정한 뒤였다. 시신 도착 하루 만인 14일 밤 오후 9시 양화진으로 형 집행인들을 보내 김옥균 시신을 조각 내 버렸고, 일본, 오스트리아 등 각국 외교관들은 이를 야만적인 처사로 보고 본국에 중요사건으로 보고했다.[[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3/22/FQO3UEAS5RESFKQLYULQCTZRHU|#]] 일본 내의 [[여론]]도 들끓어[* 김옥균을 홀대하고 추방하자고 말한 일본인들조차 지나쳤다고 비난했다.] 조선은 희망이 없고 우리가 개화시켜야 할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에 이용됐다.[* 이 사건을 겪고도 전혀 느낀 바가 없었는지 이후에 발생한 [[김홍륙]] 독다 사건에서도 범인의 가족을 고문하고 시신을 민중들이 갈갈이 찢도록 방치했다.][[https://cloudfront-ap-northeast-1.images.arcpublishing.com/chosun/2BJOWLCIURCEVJO7UVQ26J67SE.jpg|오래된 흑백 사진이지만 김옥균의 목이 매달려있는 사진이므로 사람에 따라 무섭거나 불쾌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이 사진은 KBS2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김옥균 사망 직후의 해설 장면에서 쓰였다.] 나중에 김옥균의 [[머리]]는 어느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절(불교)|절]]에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5&nNewsNumb=20150717828&nidx=17830|묻었다]]. [[하쿠산역(도쿄)|하쿠산역]] 인근에 위치한 절 뒤뜰에는 높이 3m 이상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상단이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얇고 높은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에 있는 무덤은 김옥균의 양자 김영진[*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친자라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이 머리에서 [[머리카락]]만 가지고 와서 따로 묻은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복권되나 [[아관파천]] 후 다시 취소됐고 1910년 6월 [[경술국치]]로 인해 [[순종황제]]가 망국 후 이왕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다시 복권돼 정1품 대방보국 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달(忠達).[* 아이러니하게도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규장각을 철폐하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